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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후반전(13)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정조의 역점사업인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제작했으며, 정조의 능행을 위해 주교(舟橋, 배를 엮어 만든 다리)를 가설하는 등 테크노크라트로서도 활약했다. 
  
그런데 막상 『정조실록』에서는 정약용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가 소수파인 남인(南人)인 데다가 서학(西學, 천주교) 교도로 몰렸기 때문이다. 실록을 편찬한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이다. 
  
성균관 유생 때 정조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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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정약용이 처음 정조의 주목을 받은 것은 1785년(정조 9년), 그가 성균관 유생이었을 때다. 유교 경전에 관한 정조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변을 올려 극찬을 받았다. 이후 정약용은 조정에 출사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했는데, 정조는 그를 동부승지, 좌부승지로 임명해 곁에 두었다. 
  
이 과정에서 정조의 관심은 ‘점점 더 성대해졌다’고 한다. “학문을 온축함이 참으로 넓고도 깊다”며 공개적으로 칭찬하는가 하면 야대(夜對, 밤에 열리는 경연)에 자주 불러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금의 사랑이 유독 한 사람에게 쏟아지다 보면 그 사람은 주위의 질시와 견제를 받게 된다. 더욱이 그 사람이 소수파에 속하고 정치적 힘도 약하다면, 사람들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진다. 정약용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는 갖은 공격과 모함을 받으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에 정조는 정약용의 능력을 공인받을 기회를 자주 마련했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자질을 과시하게 함으로써 그에게 충분한 자격이 있음을 보여주려 했다. 
  
또한 때로는 그의 품계를 강등해 지방관으로 내려보내기도 했다. 문책성 처벌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반대파의 예봉을 피하게 한 것이다. 수령으로서 치적을 쌓게 해 다시 한양으로 불러올 명분으로 삼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희망과는 달리 정약용을 향한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정약용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다. 정조는 “그대를 중용하려고 하나 의논이 매우 분분하니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 한두 해 늦더라도 손상될 것이 없다. 장차 부를 것이니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1800년(정조 24년) 6월 28일, 정조는 다시 부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승하했다. 궁궐로 달려간 정약용은 창경궁 홍화문 앞에서 가슴을 치며 목 놓아 통곡하였다. 
  
정조의 죽음에 가슴 치며 목 놓아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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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신서.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이렇게 정조라는 거대한 보호막이 사라지자 그에게는 곧 위기가 닥쳤다. 남인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서학 관련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그리하여 1801년 2월 8일, 그는 멘토인 이가환, 형제인 정약전과 정약종, 매부인 이승훈 등과 함께 체포된다. 그리고 장기현(長鬐縣, 포항)으로 유배됐다가 다시 강진현으로 이배 되었다. 기나긴 유배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와 같으면 보통 사람은 낙담하고 절망에 빠진다. 회재불우(懷才不遇)의 심정을 토로하며 운명을 원망한다. 그렇게 사그라져간 사람이 역사에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정약용은 달랐다. 유배지에서 그는 집필에 매진했다. 
  
『다산문답』, 『아방강역고』,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심경밀험』, 『경세유표』, 『목민심서』 등 수백 권의 빛나는 저술이 이 시기에 완성된다. 비록 현실에 참여해 직접 세상을 바꿀 기회는 잃었지만, 책들을 통해 언젠가 그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이어 가주길 바랐다. 
  
무릇 운명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일지라도 어떻게 살아갈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불우하고 힘든 환경을 주더라도 그것을 어떤 식으로 견뎌낼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몸을 의탁한 정약용은 인생 후반에 닥친 불우함에 낙담하지 않고 치열하게 자신을 일궈갔다. 덕분에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큰 학자 ‘다산 정약용’으로 남은 것이다.  
  
김준태 동양 철학자·역사 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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