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서 성공한 하이엔드 디자이너 "남들 스케치 100장 그릴 때, 난 5장만 그려"
"노력형 인간 재정의 돼야, 불안에 쫓긴 분주함보다 ‘나다운' 생각이 먼저"
성수동 구두 장인과 손잡고 ‘메이드인 코리아’ 명품 만들기 박차
뉴욕 하이엔드를 대표하는 독립 디자이너 유나양(40세). 장인과 제조업을 중시하는 밀라노에서의 경력을 바탕으로 성수동 장인돕기 프로젝트에 코트라와 함께 한다. 코트라는 이 프로젝트의 물류와 수출을 담당한다./사진=성형주 기자
뉴욕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유나양이 한국에 왔다. 성수동 구두 장인들을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유나양이 누군가. 냉정한 뉴욕 패션계에서 18번째 컬렉션을 치르며 성공적으로 안착한 한국계 디자이너. 샤넬, 에르메스가 지겨운 뉴욕 상류층 고객, 이를테면 킴 카다시안 패밀리나, 캐리 언더우드(그래미상 수상 가수), 메이 머스크(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가 총애하는 하이엔드 디자이너다.
아시아계 독립 명품 디자이너가 드문 패션계에서 미국·유럽·중동을 비롯, 대만과 일본의 유명 백화점 명품관, JFK 면세점에서도 그의 고가 옷이 팔려나간다. 리스 위더스푼과 로버트 패틴슨이 출연한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의 영화 의상 작업 이후로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연이은 구애도 거절한 그가 왜 성수동 구두 장인들을 만나러 급 귀국한 걸까.
-왜 왔습니까?
"작년즈음인가, 성수동 구두 장인이 값싼 공임으로 고생한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한 켤레에 6천 5백 원을 받는다고. 굉장히 마음이 아팠어요. 제가 훈련받은 밀라노에선 디자이너가 빛나는 직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빛내주는 직업이에요. 장인, 제조업자가 동등한 파트너죠. 밀라노나 뉴욕 등에서 제가 배운 선진국 시스템으로 그분들을 좀 도와주고 싶었어요."
장인과 제조업자가 살아야 패션 강국이 된다는 그의 생각에 행동의 날개를 달아준 건 코트라(KOTRA)다. 코트라는 ‘성수동 장인 돕기 프로젝트'를 발족하고 유나양과 현장 방문과 멘토링을 시작했다. 내한과 동시에 그는 문재인 대통령 구두를 만들어 화제가 된 장애인 구두 회사 ‘아지오', 청년과 어르신의 노동력을 잇는 ‘서울 가죽 소년단'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구체적으로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나요?
"그동안 저는 도쿄의 명품 백화점인 이세탄 백화점, 뉴욕의 삭스 백화점, 팍스 영화사 등과 일하면서 디자인은 물론 시장 판매까지 총괄한 경험이 있어요. 상품 준비부터 가격, 전시, 유통까지 제가 들어가서 제품력을 높이는 게 관건이에요. 가령 ‘아지오'는 장애인분들이 만들어서 유명해졌는데, 이제는 ‘장애인이 만든 구두'가 아니라 ‘장인의 구두'로 업그레이드해야 해요. 제품의 매력으로 홀로 설 수 있어야죠. 디자인보다는 방수 가죽 등 좋은 소재를 써서 백화점 팝업스토어에 내놓고, 재료 구매 등 소싱과 해외 유통망을 뚫는 방법 등을 찾고 있어요."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Orange is New Black'의 주연 배우 다샤 폴란코(Dasha Polanco)가 MTV awards에서 유나양의 드레스를 입었다. 미국 인기 토크쇼에서 통통한 여성도 패셔너블한 드레스를 입을 수 있다는 주제로 유나양의 의상이 소개됐으며, 여배우 다샤는 유나양과의 협업으로 그해 피플지에서 페셔니스타로 선정됐다.
-유나 양(Yuna Yang)은 이제 뉴욕 최고급 브랜드로 자리 잡았어요. 돈 많은 상류층 고객들이 당신의 행보를 주목하고 있지요. 이번 프로젝트가 잘 안되면 명성에 영향을 미칠텐데요.
"얼마 전에 제가 유엔에서 연설을 했어요. 유엔 심포지엄에서 각국 대사들을 상대로 ‘크리에이티브 이코노미'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였어요. 패션업계는 한국을 흔히 제조업 국가로 생각해요. 저는 이번 성수동 장인 프로젝트로 내 조국이 고품격 패션을 만들어내는 나라라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포부가 크군요.
"환경문제나 젠더 이슈는 항상 관심을 두고 있었어요. 시인이나 작가라면 그런 동시대 이슈를 글로 풀어내겠죠. 전 디자이너니까 데뷔 때부터 컬렉션에서 옷으로 표현한 거죠. 재활용 소재나 자연에서 영감받은 형태를 반영하면서요."
-디자이너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고 있지요?
"디자이너는 나의 재능으로 옷을 팔아서 많은 사람을 벌어먹이는 직업이에요(웃음). 절대 화려하지 않죠. 원단업자, 제조업자의 협업은 필수예요. 그런데 한국은 장인과 제조업자에 대한 처우가 좋지 않고, 그 결과 ‘메이드 인 코리아'는 ‘명품은 안된다’라는 인식을 남겼어요. 제가 뉴욕에서 처음 ‘유나양'을 고가 브랜드로 론칭할 때도 다들 반대했어요. ‘너는 한국 출신이니까 하이엔드는 안 돼'라고요. 그런 편견을 깨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가 봐요."
유엔 스피치에 앞서 패널리스트들과 논의 하고 있는 모습. 유네스코 관계자, 유엔 외교관들 앞에서 창의성이 어떻게 더 나은 세상에 기여하는가에 대해 주제 발표했다.
-왜 고가의 하이엔드를 하지요? 보통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인데요.
"여담이지만 알렉산더 맥퀸 꾸띄르 디자인실에서 일했던 친구가 자기 약혼자에게 저를 소개하면서 그래요. ‘보통 사람은 스타일 스케치 10개를 해오라고 하면 100개를 해오거든. 유나는 달랑 5개만 해와. 재밌는 건 화를 내려다가도 금세 5개의 완성도에 빠져든다는 거지.’ 전 양으로 승부하는 걸 정말 싫어해요. 일하는 스타일도 ‘doing’보다 ‘thinking’이에요."
-게으른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텐데요.
"그게 제 성향에 맞아요. 저는 에너지 낭비를 극도로 싫어해요. 100장 만들어서 10장 뽑는 것보다, 5장을 10장처럼 만드는 게 더 낫다는 거죠. 양보다는 질이 우선이에요. 그런 제 성향을 힘들어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쩔 수 없죠. 제 에너지가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웃음)."
-스스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이 되어 있군요.
"네. 저는 파고들어 가는 타입이라, 대량 생산은 안 맞아요. 그래서 고가의 하이엔드만 하죠. 내가 지치지 않도록, 할 수 없는 일은 안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할리우드에서 영화 의상 제안도 많았지만, 6개월 이상 연락 와도 거절했어요."
-보통은 기회가 사라지면 어떡하나 일단 잡고 보지요.
"일이나 기회는 정말 신성한 거예요. 제가 준비가 안 된 채로 덥석 맡으면 다음이 없어요. 진짜 기회가 사라지는 거죠. 결정할 땐 항상 10년 후에 내가 봐도 이 결정에 만족할까를 생각해요. 그러면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게 돼요."
유나양은 디자이너가 된 건 우연이었다. 인천에서 할로겐램프 제조업을 하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큰 기대 없이 "알아서 커 줬으면"하는 3남매의 둘째였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스튜디오에서 고뇌하는 화가가 되기엔 ‘에고’가 부족했다. 뚜렷한 목적 없이 이탈리아에 6개월 어학연수를 갔다가 카페에서 명품 발렌티노에서 일하던 할머니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다. 할머니의 권유로 패션 학교인 마랑고니( Marangoni)를 마치고 이태리에서 직장을 찾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얘야! 네가 어떻게 거기서 직장을 구하니?"
백인과 흑인, 아시아인,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조화롭게 등장하는 유나양 컬렉션.
-어머니의 부정적인 말에 발끈했군요.
"네. 딱 3개월만 달라고 했어요. 두 달 간 이탈리아에 있는 패션 회사 리스트를 모조리 구해서 팩스로 이력서를 보냈어요. 담당자가 출근하자마자 볼 수 있도록 새벽에 집중적으로 보냈어요. 3~4백 장 정도 보냈는데, 답변이 왔어요. 제가 보낸 스케치 1장이 알비에로 마르티니(베이지색 지도 프린트 가방으로 유명한 브랜드)의 눈에 띈 거죠."
-에너지가 많지 않다더니 이력서 3백 장을 보낼 에너지는 어디서 나왔나요?
"하하. 꼭 필요할 땐 에너지를 과감하게 써요. 경력 없는 외국인이 취직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죠."
그 뒤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2002년 밀라노 패션위크에 데뷔하고, 런던의 패션 명문 학교 세인 마틴(Central Saint Martins)을 거쳐 2010년 뉴욕 패션계에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 ‘유나양'을 론칭했다. 처음부터 고급 소재인 레이스와 실크를 과감하게 잘라 맨해튼의 패션 장인들의 전통적인 꾸띄르 기법으로 만들어 비싸게 팔았다.
명품 외의 틈새 마켓이 드물던 시장에서 뉴욕 패션 피플은 유나양의 하이엔드에 열광했다. WWD, 뉴욕 매거진은 물론 3대륙의 패션 프레스들이 앞다퉈 유나양을 다뤘고, 바이어들의 전화벨이 빗발쳤다. 무엇보다 이민자 출신이지만 도도한 뉴요커들 앞에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그의 일관된 태도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한몫했다.
-많이 싸우면서 브랜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고요.
"네. 저는 기질적으로 불공평한 건 못 참아요(웃음). 공평하지 않다 싶으면 당당하게 나갔어요. 2013년에 타임스퀘어에서 패션쇼를 하면서 록밴드랑 같이 한 적이 있어요. 워낙 유명한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라 저희 컨디션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요구를 하더라고요. 그때 "그렇게 클레임 할 거면 빠지라"고 했어요. "아무리 너희가 후원을 해도 이건 내 이름으로 나가는 내 패션쇼야!" 정면승부 하니까 그때부터 고분고분해지더라고요(웃음). 서로 존중하고 실력으로 대결하자는 거죠, 저는."
-‘을'의 가슴앓이를 안 하는군요.
"안 해요. 가슴앓이(웃음). 한번 생각하고 이건 아니다 싶으면 얘기해요. 서로를 프로라고 생각하니까."
-자기가 만든 옷에 대한 자신감인가요?
"하하. 제가 겁이 없어요. 이번 컬렉션에서 옷이 한 장도 안 팔려도 돼, 그런 마음으로 해요. 그렇게 안 하면 반복하게 되고 안주하게 돼요. 실패해도 된다는 거죠. 실제 실패도 많이 해봤고요."
리스 위더스푼이 출연한 영화 ‘워터 포 엘리펀트'의 한 장면. 폭스 영화사 부사장 줄리아 페리가 찾아와 유나양에게 영화 의상을 제안했다.
-기억나는 실패가 있습니까?
"최악의 상황이었던 때가 있었죠. 2010년에 데뷔해서 2011년까지 떠도 너무 떴어요. 그래서 뉴욕 패션계를 얕잡아봤죠. 여긴 신인이면 다 좋아하는구나. 역시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야. 구름 위를 걷다가 추락했어요(웃음). 그다음 컬렉션에서 전에 없던 걸 해보겠다고 무리했다가, 완전히 외면당했죠. 차라리 욕먹는 게 낫지, 무관심의 설움을 그때 알았어요."
전화벨 소리 없는 정적의 사무실을 처음 찾아온 사람은 폭스 영화사 부사장 줄리아 페리였다. 점프 슈트 한 벌을 사더니, 리스 위더스푼 주연의 ‘워터 포 엘리펀트' 영화 의상을 제안했다. 그때도 즉답은 피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가 중요했으니까. 다행히도 제가 1920년대 의상 콘셉트로 데뷔를 했는데, 그 영화 배경이 1920년대여서 수락했죠."
흥미로운 건 폭스 영화사 부사장을 소개한 사람이 그의 사무실에서 일한 어시스턴트였다는것. 머라이어 캐리의 전남편 닉 캐넌과의 프로젝트를 연결한 사람도 유나양에서 일하다 이직한 어시스턴트다.
-말단 직원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비결이 뭐죠?
"공평하게 대우하는 거죠. 한쪽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면 이 일을 지속할 수가 없어요."
장인이나 제조업자를 지키려는 것과 똑같은 논리라고 했다. "저는 소신이 있어요. 제 옷을 판매하는 지역의 생산자와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 하려고 해요."
아사히 신문에 소개된 S/S 2019 뉴욕패션쇼 리뷰 및 유나양 인터뷰. 젠더, 인종, 플러스 사이즈 모델 등 선입견을 깨는 비전을 보여준 내용을 크게 다뤘다.
-매번 그 지역의 생산자와 일한다는 게 가능한가요?
"그럼요. 밀라노에서 일할 때 배웠어요. 가령 일본에 수출할 땐 일본 소재 회사와 계약해서 일해요. 뉴욕에서 제 컬렉션의 90%는 맨해튼의 ‘가먼트 디스트릭트’에서 생산을 하죠. 뉴욕 디자이너들은 맨해튼 34번가에서 42번가까지, 그 지역을 굉장히 귀하게 생각해요.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장인, 하청공장, 원자재 공장, 에이전시 등이 밀집된 ‘가먼트 디스트릭트'를 지키기 위해 디자이너들이 나서서 임대료 인상을 막기도 해요."
-그런데 킴 카다시안, 켄달 제너를 비롯한 미국의 상류층 고객들은 왜 당신을 좋아하지요?
"동양 여자 디자이너가 꾸준히 하이엔드 브랜드를 만드는 게 흥미로운가 봐요. 아시아 디자이너들은 보통 테일러링에 강한데, 저는 실크 같은 부드러운 소재를 물 흐르듯이 뽑는 걸 잘해요. 기술적으로 드레이핑이 좋다는 평가를 듣죠. 그래서 제 옷은 백인 상류층 출신 디자이너가 만든 것 같다고들 해요(웃음).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명품이 ‘made in China’인데 반해 ‘유나양'은 ‘made in Newyork’인 것도 희소가치가 있지요(웃음). 무엇보다 그들은 고급스러우면서도 독특한 옷에 대한 취향이 있어요. 제 고객들은 ‘남들이 모르는 걸 나는 안다'라는 특별한 자부심으로 제 옷을 입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연예인이 입거나 소셜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꺼리죠(웃음)."
2010년 데뷔 이래 한번도 쇼를 거르지 않은 유나양의 저력이 놀랍다. JFK 면세점, 뉴욕의 삭스 백화점을 비롯해 중동, 일본, 대만 등 전 세계 10개국에서 그의 옷이 팔리고 있다.
-고객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참으로 감사한 존재지요. 20대부터 70대까지 강하고 소신 있는 여성들이 제 옷을 입어요. 청바지 한 벌에 40만 원, 드레스는 3~4백만원할 정도로 비싸요. 그분들이 옷 한 벌을 사면 20명에게 돈이 돌아가요. 정말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백화점 판매원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가장 귀 기울여 듣습니다."
-해외에서 인정받는 당신의 성공 스토리는 많은 청년에게 모델이 되고 있어요. 롤모델이 된다는 데 부담은 없습니까?
"(낯빛이 어두워지며) 전 다소 걱정스럽습니다. 전 ‘원 오브 뎀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남들이 하지 않은 걸 했어요. 저의 독특한 행로를 따를 필요는 없어요. 외국에서 활동하는 걸 대단하게 볼 필요도 없죠. 세계 어디를 가든 똑같이 치열하고 힘들어요(웃음). 한국은 강대국 중 하나고 인터넷은 세계를 연결하죠.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그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한국에선 ‘퇴사하겠습니다' 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예요.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윗세대의 계몽에 대한 저항이자 분노지요. 좀 다른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온 당신은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고 있지요?
"열심이라는 말의 의미가 다시 규정돼야 할 것 같아요. 저도 한국에서 청년기를 보냈는데, 어른들은 뭘 많이 하고 시간을 많이 쓰는 행위를 ‘열심’이라고 생각하더라고요. 전 우리 회사 직원들이 출근해서 컴퓨터 켜고 당장 부산스럽게 뭘 열심히 하려고 하면 불러세워요."
-직원들을 저지하는 이유는요?
"출근해서 1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요. 뭘 할지 생각하라는 거죠. 처음엔 당황하다가 이젠 이해를 해요(웃음). 생각을 정리하면, 뭘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 순서가 보여요. 불안하니까 생각을 안 하고 과하게 시간을 쓰고, 그러니까 더더욱 미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죠. 전 ‘열심히 노력해라’는 말 대신 ‘열심히 고민해라’ ‘너 자신과 대화하라'고 해요. 그래서 우리 회사는 패션위크 기간 동안을 빼곤 야근이 없어요."
그는 어른들이 "너는 왜 열심히 하지 않느냐?’라는 말은 무례라고 했다. 타인이 누군가의 ‘열심'을 규정할 수는 없다고. 그 자신, 열심히 생각하는 중인데 어른들은 왜 가만있느냐고 질타를 했었다고. "삶의 방식이 다양해졌잖아요. 돈 많이 벌고 남 보기 번듯한 직업을 갖고,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누가 그런 삶의 영감을 주었나요?
"언젠가 머라이어 캐리의 전 남편인 닉 캐넌과 협업을 한 적이 있어요. 엔터테인먼트와 운동화 사업 등을 하는데, 그분이 저와 일하는 조건으로 3가지를 내걸었어요. 첫째, 공동작업 작업물에 너의 개성을 확실히 살려라. 둘째, 공립학교의 저임금 자녀들에게 아트와 디자인 마스터 클래스를 해라. 셋째, 판매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해라. 보통은 홍보 인터뷰 몇 회 등을 계약 조항을 거는데 완전히 다른 조건이었죠. 머리가 트이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만난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 운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어요."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어머니 메이 머스크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기부금 파티에서 입은 옷을 디자인했다. 미국 <보그> 편집장 애나 윈투어가 주최하는 그 유명한 메트 갈라(Met Gala)쇼는 명품 브랜드와 하이엔드 디자이너들의 불꽃 튀는 격전장이다. 그를 메이 머스크에게 소개한 사람은 폭스 영화사 부사장 줄리아 페리.
-뉴욕 사교계와도 교분이 두텁던데 의외로 미국 <보그> 편집장인 애나 윈투어와는 접점이 없는 것 같더군요. 다들 패션 권력자 애나 윈투어의 인가를 받으려고 안달인데요.
"애나 윈투어는 대단한 편집장이죠(웃음). 하지만 전 한 사람의 입김과 위력으로 패션계가 좌지우지된다는 게 좀 불편해요. 소수의 셀러브러티와 유명 모델에게 의지하는 것도 좀 못마땅하고요. 전 패션쇼 할 때도 유명 모델도 잘 안 써요. 그게 더 근사하지 않나요(웃음)."
-그런데 당신도 애나 윈투어가 주최하는 그 유명한 메트 갈라(Met Gala)쇼에서 메이 머스크의 의상을 담당해 유명세를 치르지 않았나요?
"그렇죠(웃음). 그건 메이 머스크라는 분이 정말 멋있어서예요. 일론 머스크의 엄마이기 전에 당당한 슈퍼 모델이었어요. 바지 정장에 늘어지는 케이프를 만들어서 드렸는데, 정말 근사했죠."
메이 머스크는 자신을 세상에 소개한 사람으로 ‘메트 갈라, 홍보담당자 그리고 유나양'을 꼽았다.
유나양 2019 S/S 컬렉션 백스테이지. 자기다움을 지키고, 현장의 제조업자를 지켜내고, 판매원과 고객에게 감사함을 표하며 만든 노동의 결과물. 그럴 때 옷은 비로소 겉만 번드르르한 한 장의 천 쪼가리가 아닌 위엄이 깃든 육체의 외피가 된다.
-존경하는 디자이너는 누구죠?
"컬렉션을 10회 이상 치른 디자이너들은 다 존경해요(웃음). 그걸 지속해서 해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거든요. 특별히 아자딘 알라이아는 고집스럽게 자기 디자인을 지켜내서 좋아해요. 이세이 미야케는 선구적으로 모피(fur)를 정리하고 그 소신을 지켜낸 면이 존경스럽죠. 제자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떠난 것도 본받고 싶고요."
올해 마흔이 된 그녀는 50대가 되면 자신의 브랜드를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일흔이 넘어서도 디자인하고 있는 모습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미래의 악몽이라고.
-하지만 노라노 선생이나 진태옥 선생은 100세 가까운 고령에도 여전히 패션계에서 일하는 걸 멈추지 않는데요.
"그분들을 정말 존경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웃음). 슈퍼바이징하며 도울 순 있지만, 저는 50대 이후엔 다른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은 몇만 명에게 옷을 입히는 게 중요하지만, 더 나이 들면 공평한 교육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요. 제가 받은 창조성을 나누면서요."
-자신의 어떤 점이 가장 자랑스러운가요?
"2010년 데뷔 이래 뉴욕에서 거르지 않고 쇼를 했어요. 독립디자이너가 1년에 두 번 쇼를 계속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도, 예산이 부족해서 원하는 모델을 못 쓸 때도 있었고 보여주기 싫은 옷도 있었죠. 그럼에도 계속했고 일정 수준 이상의 쇼를 꾸준히 보여줬어요. 그게 쌓여서 신용이 되고 브랜드가 되고 로열티가 생겼어요. 뉴욕 애들도 저더러 독하다고 해요(웃음). 들고나는 시장이라 3년이 고비였어요. 3년 버텨서 5년이 되고, 5년 버티면 10년이 돼요. 그 뒤론 죽 갈 수 있어요."
자기 에너지를 파악하고 그것에 맞는 길을 간 유나양. “저는 저를 믿고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어요. 오랜 기간 똑같은 일을 처음의 신조를 지키다보면 그 추억을 함께 한 사람들이 로열 커스터머가 되고 명품이 되는 거죠.”/사진=성형주 기자
탐욕의 기미가 없는 천진한 얼굴에 일순 떨림이 일었다. "저는 포기할 줄 모르는 애인가 봐요."
7년 전에 만난 삭스 백화점의 바이어는 유나양에게 앞으로 최고급과 저가 시장만 남고 중저가 세컨드브랜드 시장은 없어질 거라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실제 시장은 그렇게 가고 있다.
"주변에서 세컨드브랜드로 확장을 하라고 할 때도 저는 제 스타일을 고수했어요. 저를 믿고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했어요. 오랜 기간 똑같은 일을 처음의 신조를 지키면서. 그러면 그 추억을 함께 한 사람들이 로열 커스터머가 되고 명품이 된다고 저는 믿어요. 그런 단순한 공정이 하이엔드 브랜드고 디자이너가 할 일이죠."
불안에 쫓긴 열심이 아닌 자발적 열중으로 빚은 삶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지속가능한 성실, 즉 신용이라고 부른다.
유나양은 최근 뉴욕에서 18번째 패션쇼(2019 S/S)를 치렀다. 컬렉션의 테마는 ‘freedom’. 쇼에는 백인과 흑인과 아시아인, 마른 모델과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함께 등장했다. 유럽의 장인 정신과 미국의 실용주의, 동양의 우아함이 삼위일체를 이루는 유나양의 옷은 ‘공평을 추구하는’ 그의 삶처럼 자유롭고 온유하며 기품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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