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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28 명동'에 있는 에르메스관. 에르메스가 기증한 의자와 신영균씨가 지금까지 받은 트로피가 전시돼 있다.

1968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온 나라가 눈물바다였다. 정소영 감독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멜로드라마의 새 장을 열었다. 서울 국도극장에서 7월 16일 개봉, 65일 동안 롱런하며 36만2000명을 모았다. 그때까지 한국 영화, 외화 통틀어 최다 관객이던 ‘성춘향’(1961년·36만1000명)’의 기록을 갈아치운 수치였다. 지금처럼 수백 개 멀티플렉스 동시개봉으로 환산하면 1000만명을 훌쩍 넘는 숫자이다. 당시는 한 극장에서 한 영화만 상영했다. 개봉관에서 먼저 상영한 후 2번관, 3번관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필름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돌았다. 영화비는 100~200원. 개봉관이 가장 비쌌고 다음 관으로 갈 때마다 싸졌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보기 위한 인파는 을지로 4가에 있는 국도극장 매표소에서 시작해 을지로 3가 네거리를 돌아 명보극장까지 이어졌다.

 

영화는 유부남 신호(신영균)와 사랑에 빠진 혜영(문희)이 아이를 낳아 혼자 기르다 아이의 미래를 위해 아빠에게 보내면서 눈물 빼는 줄거리이다. 흥행에 힘입어 시리즈로 6편까지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통속극의 전형을 만들었다. 시대는 변했지만 불륜, 미혼모, 혼외자식이 등장하는 이야기 구조는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은 대만, 홍콩, 일본 등에도 수출돼 바람을 일으켰다. 한류의 뿌리였던 셈이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영화의 중흥기였다. 영화진흥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 1인당 연간 영화관람 횟수는 4.2회로 세계 1위이다. 미국이 3.5회, 일본은 1.2회다. 1960년대 국민들의 영화 사랑은 어느 정도였을까. 1966년이 5.4회, 1968년이 5.7회였다. 1968년에 제작된 영화는 200여 편, 전국 영화관은 500곳이 훌쩍 넘었다. 명절이면 웃돈을 받고 영화표를 파는 암표상 단속이 뜰 정도였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의 남자 주인공 신영균 한주홀딩스코리아 명예회장은 영화 중흥기 충무로를 주름잡던 대표 스타였다. 1960년 영화 ‘과부’로 데뷔해 1970년대 말까지 ‘연산군’‘빨간 마후라’ ‘저 하늘에 슬픔이’ 등 317편에 출연했다. 1년에 20~30편씩 겹치기 출연을 했다.

 

“나는 여전히 현역 배우”

 

원조 한류스타는 올해 만 아흔 살이 됐다. 지난 10월 10일 서울 명동 한복판에 있는 ‘호텔28 명동’에서 그를 만났다. 호텔은 신 명예회장 소유다. 과거 증권빌딩을 리모델링해 2년 전 오픈했다. ‘28’은 그가 태어난 1928년에서 따왔다. 이곳에 그의 사무실이 있다. 신 명예회장은 요즘에도 매일 사무실로 출근을 한다. 줄무늬 회색 정장에 자주색 넥타이를 하고 가슴에 흰색 ‘포켓치프’를 꽂은 노배우가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만 90세의 나이가 안 믿길 정도로 정정했다. 걸음걸이는 꼿꼿했고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신 명예회장은 배우로도 사업가로도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꼽힌다. 90세까지 명예, 재산, 건강을 모두 지켜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배우와 함께 반세기 한국 영화를 돌아보고 성공한 삶의 뒷이야기를 들었다.

 

“‘미워도 다시 한 번’ ‘빨간 마후라’ 인기는 대단했지요. 당시 동남아를 점령했어요. 대만 공항에 내렸는데 기자들이 진을 치고 팬들이 어마어마했어요. 기병대가 출동해 길 정리를 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미워도 다시 한 번’은 저에게 의미 있는 영화입니다. 액션사극 배우에서 멜로 배우로 만들어줬으니. 아쉬운 것은 영화가 한류의 원조인데 아직 세계로 시장을 넓히지 못한 겁니다. 우리 시장으로는 영화 발전에 한계가 있어요. 대기업들이 영화 사업을 하고 있으니 이왕이면 과감하게 투자하고 작품을 만들어서 시장을 개척하면 좋겠어요.”

 

그는 “후배들이 더 큰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면서 “나도 배우로서 욕심이 살아 있다”고 말했다. 좋은 작품만 있다면 투자도 하고 출연도 하고 싶다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니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처럼 강인한 역할이면 좋겠다고 답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영화 ‘람보’의 실베스터 스탤론처럼 근육질 주인공도 자신 있었다고 한다. 아직도 마음은 ‘노인’보다 ‘람보’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는 “가끔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오는 감독들이 있긴 하지만 마음을 끄는 작품을 아직은 못 만났다”고 말했다. 6년 전에도 그는 대학로 무대에 섰다. 서울대 동문 연극 모임인 ‘관악극회’ 창립 공연 ‘하얀 중립국’에서 신부 역할을 맡았다. “대사가 많아서 외우느라 혼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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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균이 출연한 영화. 1964년 '빨간 마후라'(왼쪽), 1969년 '미워도 다시 한 번2'.

“죽을 고비 숱하게 넘겼죠”

 

화려한 톱스타의 삶이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많을 땐 1년에 30편을 찍은 적도 있다. 촬영장을 옮겨 다니며 하루 4~5편씩 찍다 보니 잠잘 시간도 없었다. 죽을 고비는 숱하게 넘겼다. 당시 영화 촬영 현장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세트시설은 물론이고 특수촬영 기술이 떨어지니 몸으로 때워야 했다. 파일럿으로 출연한 ‘빨간 마후라’에서는 조종석 유리창이 총알에 맞아 박살이 나는 장면을 찍기 위해 등 뒤에서 진짜 소총을 쐈다. 사극 ‘연산군’에서 말 타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말을 처음 타는데 진짜 경주마를 데려왔어요. 올라타자마자 그냥 뛰는데 죽을 뻔했어요. 한번은 경복궁에서 말이 갑자기 좁은 문으로 질주하는 바람에 1초만 고개를 늦게 숙였어도 머리가 온전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땐 가이다마(대역)를 잘 안 썼어요.” 몸을 던져 배운 덕에 말을 가장 잘 타는 배우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한겨울 강에 빠질 뻔한 적도 있다.“‘나그네’라는 영화였어요. 노름만 하는 아들 역할이었는데 아버지가 한강으로 데려가 얼음을 깨고 물에 빠트리는 장면이었어요. 아내가 밤새 비닐로 옷을 만들어 입혀줬는데 비닐에 물이 다 들어와서 몸이 가라앉는 바람에 죽다 살아났지요.”

 

위험한 촬영 환경은 그를 사업가로 만들어준 계기였다. 만일을 위해 가족이 살 궁리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촬영차 오고가던 대만에서 볼링장을 본 순간 ‘되겠다’ 싶었다. 1972년 명동에 ‘신즈 볼링장’을 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볼링 붐 덕에 돈을 벌어 아예 볼링장이 있던 건물을 샀다. 바로 ‘호텔28 명동’ 건물이다. 명동에 다시 문화가 꽃피길 바라면서 영화를 테마로 내세운 호텔이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오래된 영사기가 놓여 있고 호텔 곳곳에 우리나라 영화사의 작은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호텔 4층에는 청룡상, 대종상 등 그가 지금까지 받은 트로피들을 전시해놓은 공간도 있다. 한쪽에선 흑백 시절부터 오래된 한국 영화 필름이 돌아가고 있다.

 

당시 그의 편당 출연료는 70만원 선이었다. 집 한 채 값이 200만~300만원 하던 시절이었다. 출연료 모은 돈으로 명보제과, 극장, 부동산을 사면서 그는 큰 자산을 일궜다. 2014년 ‘재벌닷컴’은 신 명예회장의 재산이 2830억원으로 SM 이수만, YG 양현석을 제치고 연예인 최고 부자라고 밝혔다. 그의 빌딩은 하나투어가 운영하고 있는 서울 종로구 관훈동의 ‘센터마크’ 호텔, 명보극장 등 알려진 것만 해도 상당수다.

 

배우에서 사업가로

 

그는 화려한 인기에 취하지 않았다. 인기는 짧고 불안하다는 것을 알았다. 연예기자 시절부터 오랫동안 그를 봐온 영화평론가 김두호씨(신영균예술문화재단 상임이사)는 “근면 검소하다. 비싼 밥 사먹는 걸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기부활동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허투루 돈을 쓰는 법이 없다 보니 ‘자린고비’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런 그가 2010년 통 크게 쐈다. ‘재산목록 1호’로 아끼던 명보극장(현 명동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을 내놓고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을 만들었다. 500억원대 규모였다. 예술인재를 키우고 지원하는 데 써달라는 것이 그의 기부 조건이었다.

 

“김희갑씨와 처음으로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란 영화를 제작해 개봉관에 걸려다 온갖 설움을 당했지요. 그땐 개봉관이 많이 없어서 갑 중 갑이었어요. 내 극장을 정말 갖고 싶었어요. 노력해 장만한 것이 명보극장이었지요. 나이 80이면 다 산 인생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사회에서 받은 사랑 보답하자는 생각으로 가장 아끼던 것을 내놨어요. 아주 잘했다고 생각해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은 명보아트홀에서 나오는 수익금 전액을 영화인·연극인 자녀 장학금, 필름게이트, 아름다운 예술인상 등에 쓰고 있다. 재단이 설립되고 8년 동안 35억원이 들어갔다.

 

스캔들 없는 배우

 

배우 시절 그가 스캔들로 언론을 장식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홍콩 합작영화에 출연할 때 상대역이 린다이라고 홍콩의 최고 미녀배우였어요. 촬영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그 배우가 자살을 했어요. 나와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이라는 추측 기사가 났었죠. 나중에 가정불화로 알려지긴 했는데 영화 개봉하면서 홍보용으로 부풀린 점도 있죠.”

 

상대역이 당대의 여배우들인 데다 열성팬도 많았을 텐데 진짜 유혹이 없었을까. 질문을 던졌다. “왜 없었겠어요. 그걸 이겨내지 못했다면 오늘의 신영균이 없었을 겁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거죠.”

 

그는 자기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하다. 사업을 하면서도 ‘모험’보다는 ‘안전’을 택했다. “담배 안 피우고, 술 많이 안먹고, 탈선 안 하고, 자제하고 살았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모범생의 삶이 재미없지 않느냐 물으니 “하나님은 두 가지를 다 주시진 않는다”고 답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젊은 사람보다 반듯했다. 건강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다. 오래전부터 앓아온 당뇨 외에는 특별히 먹는 약도 없다고 했다,

 

“오전에 출근했다 오후에 피트니스 클럽에 가 2시간씩 운동을 해요. 나무를 좋아해 정원 관리도 내 일이지요.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려고 합니다. 보통 하루에 6000보는 걸어요. 오늘도 벌써 1400보 걸었네요.”

 

허리에 차고 있던 만보기를 보여주며 말했다. 보통 장충동 자택에서 명동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근을 한다. 젊은 시절부터 운동으로 단련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레슬링을 많이 해 왼쪽 귀가 문드러질 정도였어요. 귀 때문에 배우 못할 뻔했지요.”

 

골프도 여전히 친다. 골프모임이 있어 정기적으로 필드에 나간다. 핸디캡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지금은 핸디를 따질 때가 아니다”라면서 웃었다. 골프모임 외에 각계 모임에 참석하느라 젊은 사람들보다 스케줄이 바쁘다. 그중에 원로들이 모이는 ‘장수클럽’이 있다. “장수클럽 멤버 중에 102세 현역 화가가 계세요. 그분이 모임에 나오면 그럽니다. 100세 안 됐으니 하고 싶은 것 열심히 하라고.”

 

다양한 모임에 참석하다 보니 가끔 오해도 생긴다. “한 정당의 상임고문 명단에 나도 모르게 이름이 올라 언론에 보도가 되는 바람에 깜짝 놀랐어요. 현재도 활동을 하고 있는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치에는 전혀 관여 안합니다.”

 

황해도 평산 출신인 그는 최근 남북관계를 보면서 고향에 갈 꿈을 꾸고 있다. “아버지 무덤이 그곳에 있으니 죽기전에 가봐야죠. 남북관계가 더 잘돼서 하루빨리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13세 때 서울에 온 그는 학창 시절부터 연극에 빠졌다. 대학 갈 생각도 없었다.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극단 ‘청춘극장’에 입단했다. 연극인들은 지금도 힘들지만, 한겨울 트럭에 무대세트를 싣고 지방 공연을 다니던 시절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서울대 치대를 들어갔다. 대학에서도 연극반을 만들어 무대에 대한 갈증을 달랬다. 치과를 개업해 치과의사로 2년을 살았다. 결국 30대 늦은 나이에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부인 김선희(84)씨와는 2016년 결혼 60주년 회혼식을 맞았다. 기념잔치 대신 탈북학생 장학금으로 10억원을 내놓기도 했다. 1남1녀로 신언식 제주방송회장과 신혜진 세영엔터프라이즈 대표가 있다.

 

“임금부터 머슴까지 다 해봤어요. 그런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멋있게 살았습니다.” 인생에서 후회가 없냐는 질문에 그가 말했다. “욕 안먹고, 실수 안 하고, 마무리 잘해서, 후배들의 모범이 되는 것이 마지막까지 내가 할 일”이라고 했다. 그가 지금까지 어떻게 90세 인생을 지켜왔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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