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생명 사상 재조명 잇달아 "박경리 詩는 그의 문학의 뿌리"
'등장인물의 옷으로 본 토지' 등 소설 새롭게 읽는 시각도 제공
2008년 3월 말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한 소설가 박경리. 그해 5월 5일 타계한 작가가 마지막으로 응한 언론 인터뷰가 됐다. /오종찬 기자
대하소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1926~2008) 10주기를 맞아 재조명하는 행사가 잇달아 열렸다. 박경리 문학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들이 모인 '토지학회'가 13~14일 강원도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포럼을 열었고, 한국시인협회는 13일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 문학관에서 박경리가 남긴 시(詩)를 재평가했다.
정호웅 홍익대 교수는 시인협회 세미나에서 박경리 문학의 뿌리를 시에서 찾았다. 그는 "박경리의 시는 감각을 넘어 정신을 문제 삼는 시이고, 근본을 문제 삼고 그것에 철저하고자 하는 근본주의의 시"라며 "이 근본주의적 정신의 시가 장대한 박경리 문학 산맥의 들머리에 서 있다"고 풀이했다. 김종회 경희대 교수는 토지학회 행사를 시작하면서 "박경리 10주기를 맞아 '토지'의 터가 견고해지고, 땅이 굳어지면서 우리로 하여금 새 꿈을 꾸게 한다"고 밝혔다.
토지학회는 '토지'를 새롭게 읽는 시각을 다양하게 제공했다. 박은정 한국외대 교수는 "7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 '토지'에서 주요 인물의 정체성은 옷차림 묘사로 제시된다"며 '옷으로 본 토지'론을 처음 제시했다. 주인공 최서희의 할머니 윤씨 부인은 주로 무채색 옷차림을 한다. 신분 차별 의식이 없었던 윤씨 부인은 소박한 흰옷으로 마을 주민들과의 동질성을 표현했다는 것. 최서희의 옷차림이 가장 자세히 묘사된다. '유록빛에 꽃 자주선을 두른 꽃신은 퍽 날렵하다'거나 '자주빛 치마에 검정 선을 두른, 생고사 깨끼 적삼을 입은 서희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는 식이다. 서희의 옷차림은 평사리에서 만주로 이동한 뒤 더 화려해진다. 빼앗긴 고향 집을 되찾겠다는 욕망을 표현하면서 만주까지 따라온 마을 사람들에게 위엄을 세우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박경리 문학의 생명 사상도 재조명됐다. 진영복 연세대 교수는 생명 사상을 '연민과 베풂의 공동체 정신'으로 파악하면서, 근대적 생산력을 내세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한다고 풀이했다. '토지는 국가도 개인도 소유하는 게 아니라 경작자만 자연에서 빌릴 수 있을 뿐'이라는 소설 속 인물의 '농본주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김정숙 충남대 교수는 '토지'의 생명 사상이 1980년대 이후 형성된 것으로 보는 기존 관점에서 벗어나 1950년대 초기 소설에서부터 '생명 의식'이 창작 원리로 작동했다고 주장했다. 6·25를 거치면서 남편과 아들의 죽음을 잇달아 겪은 작가가 '저주받은 인간의 예지(叡智)'로서 '생명 의식'에 불타는 글을 씀으로써 현실을 극복했다는 것이다.
김양선 한림대 교수도 "박경리의 초기 소설은 여성의 광기와 우울증, 히스테리를 많이 그림으로써 전후 현실에 대해 여성의 몸으로 저항한 것"이라며 "개인적 차원에서 '애도의 글쓰기'를 거친 후에야 생명과 삶의 의지를 향한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