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에도 ‘노구’ 아닌 ‘신구’, 현장 있으려 밥먹듯이 운동
"배우로 사는 일? 개똥같지만…매일 이 순간이 가장 행복"
"최고의 연기자는 최고의 성실을 가진 자, 재능 차이 없어"
82세 청춘 배우 신구. 지난 9일 대학로에서 막을 내린 연극 ‘장수상회'에서 까칠한 신사 성칠을 연기했다. 70세 첫사랑의 로맨스를 그린 연극 ‘장수상회'는 전국 순회 공연을 준비중이다./사진=이진한 기자
배우 신구를 만나러 대학로 연극공연장을 찾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노부부의 로맨스를 그린 ‘장수상회'라는 연극은 연일 매진이라 극장은 초만원이었다. 유치원생 아이부터 팔짱 낀 연인, 손을 꼭 잡은 노부부까지, 로비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학로 공연장이 이토록 붐비는 걸 본 건, 몇 년 동안 처음이다.
무대에 선 82세 신구의 몸은 날렵하고 노련했다. 객석의 거리까지 계산해서 출력된 그의 목소리는 때로 공기의 허를 찔러 기습했고, 때로 보드라운 감촉을 남기며 결을 따라 번져갔다. 반백 년 넘게 오로지 연기를 위해 사용된 그의 신체와 그의 육성, 그의 테크닉과 그의 순발력은 숭고와 완벽을 드러내기보다 자연적이고 순항적이어서 바라보는 관객을 압도하지 않았다.
아무도 탄성을 지르지 않았고, 그저 그의 장단에 맞춰 낄낄대고 웃었으나, 불이 꺼진 후엔 모두 다 조용히 흐느꼈다.
분장실에서 무심히 화장을 지우는 그를 향해 사진 기자가 셔터를 눌렀다. 거울 앞에 선 노배우의 맨얼굴엔 약간의 피로와 쓸쓸함이 묻어났다. TV 드라마에서 선생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통증이나 슬픔을 삭힌 포유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명을 참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 비명을 삼켜버린 얼굴.
소주 한 잔 곁들이며 인터뷰를 하기로 했던 터라 근처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쟁반에 배달된 소주병을 보자 막대 사탕 본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무대에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리드미컬하게 걸으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평소에도 많이 걸으십니까?
"한번 걸으면 6km 이상 걷나 봐. 일주일에 3번 이상 운동을 해요. 예전엔 양재천을 걸었어요. 뛰진 못해요. 나이 드니까 걷지. 지금 송파 쪽으로 이사 와서는 피트니스 클럽을 가요. 다리 힘이 필요해서 근육 운동도 열심히 한다고. 보약 먹으며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밥 먹듯이 운동해요. 현장에 있으려고."
소주 한 잔 맛있게 털어 넣으며 그가 말을 시작했다. 언뜻 어눌한 듯하지만 간간이 명랑하고 정갈했다.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신구의 반듯하고 화사한 웃음./사진=이진한 기자
-객석이 꽉 찼어요. 일곱 살 꼬마부터 노부부까지, 가족이 손 꼭 잡고 숨죽이며 보더군요.
"무대에서 객석을 보면, 참 고맙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요. 연극이 어렵다고들 하잖아. 손님이 잘 안 들어요. 근데 또 정 붙이면 이 맛이 기가 막히거든."
-그런데 그 많은 대사를 대체 어떻게 외우세요?
"암기 못 하면 못하는 일이니까. 연극배우들이 암기력이 좋지요. 그래도 팔십 넘으니 기억력이 쇠퇴하는 건 피할 수 없어요. 같은 분량도 대본 들고 씨름하는 시간이 길어지지. 나라고 별수가 있나. 무조건 대본을 봐요. 더 닳도록 보는 거지."
-신구라는 이름에 뭔가 특별함이 있나 봅니다. 노구에도(웃음), 이리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도전을 마다하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글쎄, 특별한진 모르겠어요. 신구란 이름은 연극계 원로이신 동랑 유치진 선생이 지어주셨어요. 본명은 순기예요. 성씨인 신에 오랠 구자를 붙어주셨어. 어려워서 이유는 물어보지도 못하고 그다음 공연부터 바로 썼지요. 아마 오래 하란 뜻이셨던가 봐."
-100세 시대에 오래 일하는 건 모든 인간의 꿈이지요.
"(웃으며)다들 예쁘게 봐주시니 가능한 일이죠."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 이 순간이 가장 좋다고. 돈 있고 여유 있어서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거지.”/사진=이진한 기자
-스물여섯부터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일하셨어요?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 연기는 종교랑 비슷해요. 종교는 없지만 도 닦는 마음으로 했어요. 구도의 심정이랄까. 영화와 TV, 연극은 조금씩 달라. 영화와 TV는 카메라 앞이라 변수가 많지만, 연극은 일정 시간의 연습이 반드시 필요해요. 더 예술성이 있다는 건 아니야. 그저 진이 빠지도록 연습한 게 정직하게 나오는 작업이죠.
재산을 모으는 일도 아니고 그냥 내가 좋아서 한 거라. 허허. 기자 양반 말대로 나한테 청년다움이 남아있다면 그건 ‘충분한 연습' 때문이에요. 젊을 때 유치진 선생에게 배운 말씀이 아직 귀에 남아 있어요. 허투루 할 수가 있나."
아쉬움은 있다고 했다. 육체적으로 가장 전성기라고 할 수 사십 대에서 육십 대까지 연극 무대를 떠나 TV와 영화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이젠 나이 드니 되려 퇴물이 된 당신을 무대에서 다시 불러주어 고마울 따름이라고, 소주가 들어가 불콰해진 얼굴로 그가 말했다.
-덕분에 저희는 그 시간 동안 선생의 연기를 안방 TV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덕에 처자식과 먹고살았죠. 허허."
-이순재 선생과는 이번에도 더블 캐스팅이세요. 연극 무대에 동지로 서 있으니 외롭지 않으시겠습니다.
"그렇죠. 젊을 땐 우리가 TV나 영화에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요. 나이 들어 ‘황금연못' ‘앙리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이번에 ‘장수상회'까지 세 작품을 같이 하고 있으니, 좋지요. 그분이 우리나라 탑 중의 탑이거든. 방송인 송해 선생을 제외하면 나이로도 탑이죠."
-두 분의 더블 캐스팅이 관객 입장에서는 참 재미있습니다. 연기 스타일도 외모도 확연히 다르시니까요. 이순재 선생은 발음이 선명하고 직진한다면, 신구 선생은 공기 반 소리 반의 호흡법이 탁월하십니다.
"다르죠. 내 발성은 무지하게 노력해서 그리된 거예요. 연기는 발음도 중요하지만, 소리의 높낮이를 운영하는 게 관건이에요. 혀를 입천장에 붙이느냐 이 사이에 닿게 하느냐… 입안에서 혀를 어떻게 놀리는가는 오직 노력만으로 되는 거거든."
-공기의 허를 찌르는 화법이 쉽게 나온 게 아니군요. 저는 전체적으로 선생의 발성이 참 둥글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화는 에너지의 흐름이에요. 소리가 공기 중에서 퍼질 때 위아래 진폭을 갖는다고. 그 에너지를 섬세하게 조절해요. 음성이 크다고 유리하지 않아요. 맥시멈으로 소리를 올리면 앞에서 듣는 사람은 귀가 아프거든. 압축하고 풀면서 리듬을 타야지. 아내 역으로 출연 중인 손숙, 박정수 씨도 호흡이 다 달라요."
-두 분 중 더 잘 맞는 분이 있습니까?(웃음).
"연습 없으면 다 허당이지(웃음). 톱니바퀴예요. 공기 중에 소리의 길을 내고 높낮이를 타야 하니까. 연습이 부족하면 무대에 같이 서 있어도 다른 시차에 있는 사람 같거든."
-최근엔 젊은 시절보다 더 왕성하게 활동하십니다. 예능, 드라마, 영화, 연극까지 장르를 불문해서요. 사랑받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몰라. 개런티가 싼 모양이야(웃음). 얼마 전엔 추석 특집극 ‘옥란면옥'도 했고, 어제도 새벽 3시까지 허진호 감독 영화 ‘천문'을 찍었어요. 세종과 장영실 사이를 잇는 황희 정승역이에요. 최근엔 다큐멘터리도 찍자고 해서 그건 거절했어요. 지방 공연도 다녀야 하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무엇보다 더 욕심 사나워지면 안되겠다 싶었지. 허허."
-여하튼 계속 미디어의 조명 아래 있다는 건 특별한 매력이 있다는 거지요.
"(바람 빠지듯 피식 웃으며)술을 좋아해서 그런가? 돌아보면 나는 그동안 이렇다 할 히트작도 없었어요. 이순재 씨는 청춘 영화도 많이 찍었는데, 나는 맨날 아저씨, 아버지, 농민 아니면 빈민이었어요. 멜로드라마 주인공도 한 번도 못 해봤지. 못 해봐서 부럽진 않아요. 그저 신통할 뿐이지. 내가 한 아저씨와 아버지는 특성이 있었고, 그걸 세밀하게 살리려고 매번 노력했어요."
종교는 없지만 도 닦는 마음으로 연기했다는 신구. 26세부터 아버지 역할로 데뷔했다. 특별히 2002년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의 복수(양동근) 아버지 역은 시청자들의 가슴에 잊지 못할 명장면을 남겼다./사진=이진한 기자
-연극 ‘장수상회'에서는 로맨스를 연기하셨어요(웃음). 82살에,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을 연기하는 기분이 남다르실 듯합니다.
"그렇지요. 치매가 걸린 건 아니지만 접근해 오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거든. 방금 만났던 사람이 돌아서서 기억 안 나면 ‘혹시 내가?’ 하는 의심이 들어요. 어쩌면 그래서 연극 대사를 더 열심히 외울 지도 모르지. 아무래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젊은 시절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릅니까? 고생을 많이 해서 웬만한 어려움은 이겨낼 수 있다고 하셨어요.
"(소주 한 잔 털어넣으며)참 가난했어요. 가난해서 내 누이들은 학교를 제대로 못 갔고, 나만 경기중학교에 갔어요. 내 부모님들이 문맹이셨거든. 그 양반들이 외아들인 나를 어떻게든 교육해보겠다고 애 많이 쓰셨지. 그런데 중학교 입학하면서 전쟁이 나서 학교는 입학할 때랑 졸업할 때만 가 봤지. 천막 치고 공부하고, 말도 못 하게 고생을 했어요. 난 그래서 지금도 웬만한 건 다 참을 수 있어요. 인내와 성실을 그때 배웠지."
연기자의 덕목도 다르지 않다고 했다.
"최고의 연기자는 최고의 성실을 가진 자예요. 재능은 큰 차이가 없어. 시간이 지나면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이 남아요. 재능이 부족한 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거든. 반면 재능 믿고 까불다가 사라진 사람들을 나는 숱하게 봤어요."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지요?
"말했듯이 문맹이셨어요. 어머니는 살림하고 아버지는 왕십리 중앙시장에서 야채 장사를 하셨지. 번듯한 것도 아니고 그저 좌판 까는 정도였어. 그 노인네가 이북 출신도 아닌데 냉면을 좋아해서 나를 가끔 냉면집에 데리고 갔어요. 그게 안 잊히네. 지금도 나는 냉면을 ‘세게' 먹거든. (이를 드러내고 함빡 웃으며)냉면에 소주 한 잔하면 세상 부러울 게 없어."
온화한 입 너머로 술도 술술 들어가고 술의 힘을 빌려 말도 술술 나왔다. 그 흐름 속에도 간간이 미소가 샘물처럼 솟았다.
그는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려다 두 번 실패 후 성균관대에 들어갔다. 한때 아나운서에 뜻을 두고 교육원을 다녔지만 "남이 써준 원고 읽느니 배우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원로 연극인 유치진이 세운 남산 드라마센터 연극 아카데미 1기로 들어갔다. 26세 때 연극 ‘소'에서 처음으로 아버지 역을 맡으며 데뷔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려고 했던 건 다른 꿈이 있어서였나요?
"상대에 가려고 했던 건 돈을 벌고 싶어서였지. 이 길을 선택한 데 후회는 없어요. 당시 유치진 선생이 세운 학교 커리큘럼이 훌륭해서 동서양 연극사와 무용까지 다 배웠거든. 내가 결정한 일이니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살다 보니 아버지로서는 낙제예요(웃음). 오로지 일이 우선이었거든."
분장실 조명 앞에서 홀로 분장을 지우는 노배우./사진=이진한 기자
-연기는 자신의 육체와 감정을 쓰는 일이라 살아온 인생과 인성이 배어납니다. 선생의 연기를 보면 약간의 체념과 화, 그리고 무심한 엇박자 유머가 보입니다. 실제 성격도 그러신지요?
"(웃으며)메이비. 그런 면이 내재해 있죠. 생뚱맞게 창조할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집사람한테 소리 지르고 그럴 때가 종종 있어요. 알고 보면 내 성격이 참 치사해(웃음). 여기 있는 이런 사람들한텐 못하지. 만만한 할망구한테만 화를 내는 거야. 집사람이 싫어하니 이젠 소리를 낮춰야지. 나이 들수록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야 하니까."
-유머 감각은 타고나셨어요?
"웃기는 거? 허허. 웃음이란 것도 반 호흡 차이야. 반 호흡 미리 치느냐, 뒤로 가느냐의 차이거든. 내가 해도 안 웃길 때가 있어. 핵심은 호흡이에요."
시트콤의 대가 김병욱 감독은 그에 대해 ‘웃기려는 의도를 감출 줄 아는, 진짜 선수’라고 평했다. 영화 ‘반칙왕'을 함께 했던 배우 송강호는 신구를 존경하는 배우 1순위로 꼽았다. "컷 사인이 떨어지기 전에는 웃으시는 법 없이 진지하셨다. 대사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 느낌까지 전달하실 뿐만 아니라, 역할과 상황을 완전히 ‘자기화’하실 줄 아신다."
2002년에 대히트한 롯데리아 광고 ‘니들이 게맛을 알아?’의 한 장면.
-뭐니 뭐니 해도 선생의 유머 중 최고의 한 수는 ‘니들이 게맛을 알아?’였어요.
"그게 처음엔 안 하려고 하다가 다들 원해서 한번 해봤지. 롯데리아 광고였는데, 콘티도 카피도 아주 절묘했어요. ‘노인과 바다' 콘셉트였거든. 망망대해에서 만선으로 시끌벅적한 큰 배의 선원들이 쪽배에 탄 늙은이를 비웃는 거야. 게 한 마리 들고 유유자적하니 우습겠지. 그런데 과연 ‘니들이 게맛을 아냐고?(웃음)’ 이 말엔 인생의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달관한 노인의 여유에 아이의 천진난만함이 동시에 느껴졌습니다. 특별히 선생이 했기에 더 말맛이 달더군요.
"그런데 그때 그 게살이 들어간 버거는 망했대(웃음). 버거는 안 먹고 광고만 본 거야. 그래도 카피는 살아서 계속 변주가 되더라고."
-시트콤이나 예능에서도 존재감이 드러나는 건 선생이 그 은근한 ‘게 맛'을 다양하게 변주하기 때문일 테고요. 시트콤에선 잘 토라지는 철없는 노인이었는데, 예능에선 또 부드러운 ‘구야형' ‘구알바'로 열일을 하셨지요.
"시트콤은 김병욱 감독의 ‘웬만하면 그들을 막을 수 없다'를 한번 했어요. 그이가 ‘순풍산부인과'나 ‘지붕 뚫고 하이킥'같은 좋은 걸 많이 했지. 요즘엔 잘 보이지 않더구먼. 나는 시트콤도 특별히 다른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배우라면 경계 없이 들락거려야 하거든. 예능은 반대로 좀 대책 없이 참여를 하는 편이에요."
‘윤식당’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성실과 웃음을 보여준 신구. ‘에고'는 줄고 ‘애교'는 많아진 유연한 어른의 모습이다.
-tvN의 ‘꽃보다 할배'나 ‘윤식당'에서 보면 습자지 같은 투명한 표정에 웃는 모습만 봐도 힐링이 되더군요.
"그래요? 허허. 내가 평소에도 말이 많지 않아. 좀 어눌하죠. 지금처럼 소주 한 잔 들어가야 말이 술술 나와요. 비겁한 성격이지. 관찰 예능도 사실 일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장르여서 난 익숙지 않아요. 다만 부담은 안 느껴. ‘꽃할배'도 다섯 명이 나오는데, 내가 특별히 더 주접을 떨지도 않잖아(웃음). ‘윤식당'은 최근엔 좀 마음이 아팠어요. 촬영했던 롬복이란 섬이 지진이 났더라고. 어찌 생각하면 내가 아직 죽을 때는 아닌가 싶기도 하고. 허허."
-살면서 크게 절망한 적은 없으세요?
"1년 정도 작품이 없는 기간이 있었어요. 난 몰랐는데 집사람이 그러더라고. 돈이 안 들어왔다고. 돈 봉투 꼬박꼬박 갖다 줬거든. 아마 연극이 어렵던 시절에 TV로 옮겨 가던 기간이었을 거야. 돌아보면 난 행운아였어요. 성실하게 일했고 일이 끊긴 적이 없었거든."
문득, 남을 위해 크게 무언가를 해본 적이 없다며 부끄러워했다. 일찌기 영화계 안팎에서 로렌스 올리비에나 숀 코너리처럼 ‘영국 같으면 진작에 기사 작위를 받았을 배우’로 꼽히던 그가. 그 말을 꺼냈더니 오히려 작위는 무슨 작위냐고 손사래를 쳤다. 만약 그런 전통이 있었더라면 일본 강점기부터 했던 분들, 고인이 된 분들부터 먼저 예우해야 한다고.
-좋아하는 배우는 있으세요?
"마론 브란도를 좋아했어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작품이 훌륭했지요."
1998년 개봉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 20년 전 신구의 모습이 새롭다.
-선생도 한석규 씨와 출연했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나 송강호 씨와 나왔던 영화 ‘반칙왕'에서는 잊지 못할 부자지간의 한 장면을 보여주셨어요. 죽기 전에 비디오 사용법을 가르쳐주던 아들, 밤마다 가면 쓰고 뛰어다니는 아들… 그 슬픔과 돌발의 에너지를 차분하게 응대하면서요.
"허허. 그게 허진호 감독이나 김지운 감독이 작품을 잘 써서 그렇지. 내가 표현할 수 있도록. 내가 출연한 전체 작품이 다 기억에 남진 않아요. 하지만 그런 장르에 내가 쪼끄만 토막이라도 기여를 했다면 고맙지."
크게 소리내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듯, 그가 말을 끊고 내 잔에 술을 따랐다. 자기 삶을, 일을, 다 껴안아 본 자의 본질적 충만이 느껴졌다. 앞으로도 자만하거나 자책할 시간은 없다는 듯.
-배우로 사는 게 그렇게 즐거우세요?
"즐겁냐구? 개똥 같아."
-개똥 같다니요?
"연금도 없잖아. 하하. 그런데 연금만 없나. 상사도 없어. 내 맘대로 해도 되니 얼마나 좋아. 이래라저래라 지시하는 놈 없이 우리끼리 합을 맞추고 상의하니 얼마나 좋냐고. 내가 대단히 도움 주는 일을 한 적도 없는데 사랑받으니 또 얼마나 고마워. 할망구하고 먹고살게 해줘서 고맙고. 개런티 받으면 또 즐거워."
-언제 가장 행복하셨어요?
"지금. 매번 지금이 행복해. 지금이 제일 좋다구. 나이 들수록 더 그래. 이 순간에 집중해서 살려고 해요. 내가 가진 최선을 다해서 쌓이면 그게 내 역사가 되는 거야. 좋지. 돈이 있다고 여유가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거지."
길에 구르는 개똥 같이 행복하다고 그가 다시 한번 크게 웃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거리로 나가니 그 주위로 연극 하는 젊은 후배들이 "선생님, 선생님!" 하며 하나 둘씩 몰려들었다. 그의 옷자락이라도 잡으면 생의 기쁨과 지혜가 내게 올까 하여... 자정 즈음, 대학로 밤거리는 인적 없이 어두운데 신구 주위엔 따뜻한 빛과 소리가 오래도록 너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