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패션? 서양은 동물권, 국내는 환경권에 중점
모피의 모순… 동물에겐 가혹하지만 친환경적 소재
반려동물 인구 늘어도 여전히 모피 찾는 사람 많아
”동물 모피는 비윤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모피의 우수성을 알리는 행사로 기획된 ’아시아 리믹스 2018’/국제모피협회 제공
"모피는 아름답고 윤리적인 천연 소재입니다."
지난 2일 서울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서는 국제모피협회(IFF)가 주관하는 ‘아시아 리믹스 2018’이 열렸다. 한국과 중국의 유명 디자이너가 선보이는 모피 패션쇼와 아시아 5개국 신진 디자이너들의 모피 디자인 경연이 이어졌다. 화려한 무대와 달리, 행사장 분위기는 차분했다. 행사 중간중간엔 모피의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인 면을 강조하는 영상과 멘트가 반복됐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가장 오래된 의류 소재인 모피가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모피 퇴출(Fur-Free) 운동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난 시위자들이 아닌, 패션계의 자발적인 움직임이다. 아르마니, 구찌, 베르사체, 버버리 등 유명 브랜드들이 비윤리적이란 이유로 동물 모피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세계 4대 패션쇼로 꼽히는 런던패션위크는 지난 9월 열린 패션쇼부터 동물 모피로 만든 옷을 퇴출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내년부터 모피 생산과 판매를 금지하기로 했다.
◇ 가열되는 모피 퇴출 운동, 국내는 미지근…왜?
세계 패션계가 모피 퇴출을 부르짖고 있지만, 국내 반응은 미지근하다. 오히려 한동안 하락세였던 국내 모피 시장은 상승세를 보인다. 신세계백화점에 따르면 2015년 -11% 역신장을 기록한 모피 매출은 2016년 0.1% 상승세로 돌아선 뒤, 2017년에 17% 상승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24.9%까지 매출이 치솟았다. 연령별 매출 실적을 살펴보면 30대 매출 비중이 2015년 20%에서 지난해 27%까지 늘었다.
서울 강남 한 백화점의 모피 매장 전경./김은영 기자
신세계 관계자는 "모피 원피 가격의 하락에 따라 상품 가격이 3~4년 전보다 30% 이상 저렴해졌다. 이에 따라 프리미엄 패딩으로 몰렸던 20·30대 젊은 고객들이 모피로 옮겨가고 있다"고 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국내 모피 수입량은 2001년 148억 달러에서 2011년 423억 달러로 3배 가까이 급증했다. 이후 수요가 줄어 2016년 254억 달러까지 떨어졌지만, 지난해 279억 달러로 증가세로 돌아섰다. 해외 경매시장에서 모피 원피 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진 데다, 모피 의류의 디자인이 다양해지고, 코트의 옷깃이나 점퍼의 모자에 털을 장식하는 경우가 늘면서 모피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올해도 국내 모피 시장의 전망은 밝다. 특히 작년에 이어 올겨울에도 혹한이 계속될 것으로 예보됨에 따라, 주요 모피 업체들은 수입 모피 발주량을 20% 안팎으로 늘렸다.
◇ 서양에서는 동물권, 국내에선 환경권에 중점
세계 패션계는 모피 퇴출을 부르짖는데, 국내 패션계는 왜 반대로 가는 걸까? 유행에 민감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곳에서 말이다. 우리 소비자가 몰지각해서? 아니다. 윤리적 소비에 대한 국내 소비자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가격이 좀 비싸더라도 친환경, 공정무역을 앞세운 식료품을 찾는 소비가 느는가 하면,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비건 화장품도 미용 시장의 카테고리로 자리 잡고 있다.
인조 모피도 페이크 퍼(fake fur), 에코 퍼(eco fur)라는 이름으로 주가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모피 퇴출로 연결되진 않는다.
동물 모피의 대안으로 떠오른 인조 모피는 윤리적일까? 수명이 짧고 썩지 않는 인조 모피는 환경적인 면에서 유해하다./구찌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모피가 가진 모순을 지적했다. "동물권의 시각에서 보면 모피는 비윤리적이지만, 환경적인 측면에서 보면 자연 폐기가 가능한 친환경 소재다." 비윤리적인 모피가 친환경적이라니. 게다가 모피의 대체재로 쓰이는 인조 모피가 환경에 더 해롭다면?
인조 모피는 아크릴과 폴리에스터 등 합성 섬유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수명이 짧고, 분해되는 데도 수백 년이 걸린다. 플라스틱을 원료로 하는 폴리에스터의 경우 하수처리시설에서 걸러지지 않는 미세 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가 해양 생물의 먹이가 되기도 한다. 즉 인조 모피는 동물 복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으나, 지구에는 유해하다.
윤리적인 소비에서도 친환경에 관심이 많은 국내 소비자의 특성상, 동물권이 기준이 되는 동물 모피 사용 문제는 아직 관심 밖이란 분석도 있다. 지난해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착한 소비의 의미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응답자의 52.9%가 ‘친환경적인 소비’라 답했고, 47.3%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소비’라고 응답했다. ‘사회문제에 도움이 되는 소비’는 37.4%, ‘윤리적 기업에 반대하는 소비’는 30.1%의 응답률을 얻었다.
최근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가 늘고 채식주의자가 늘면서, 국내에서도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생기는 분위기다. 그 때문에 국내 패션계에도 모피 사용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피 전문 업체 진도가 올 초 주얼리 업체 석전상사를 인수한 것도 모피를 대체할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한 것이란 분석이다.
한 패션업체 관계자는 "가성비와 패션성을 따지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따라 인조 모피 제품을 늘리고 있지만, 여전히 동물 모피를 찾는 고객들이 많기 때문에 퇴출 여부는 고려하지 않는다"면서도 "윤리적이고 지속가능한 패션을 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시장의 흐름을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