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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서 쓰러진 비운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페르디난트 大公 부부


1914년 6월 28일 아침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분위기는 묘했다. 겉으로는 귀빈을 맞이한 환영 열기로 들떴으나 안으로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사라예보를 찾은 귀한 손님은 다름 아닌 대공(大公)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1863 ~1914) 부부였다. 대공은 유서 깊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위를 계승할 사람이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당시 제국의 일부였다. 사라예보 주민들 입장에서는 장차 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을 미리 알현하는 흔치 않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마냥 즐겁기만 한 방문은 아니었다. 이웃 나라인 세르비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한 것(1908년)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는 이 지역을 차지해 슬라브인을 중심으로 한 대(大)세르비아 국가를 건설코자 했다. 이 꿈을 좌절시킨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원수 그 자체였다.

세르비아의 여러 비밀 테러 단체가 동시에 대공 부부의 목숨을 노렸다. 제국 정부도, 대공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방문 일정은 취소되지 않았다. 이동 시에는 테러에 취약한 오픈카가 그대로 사용됐다. 무모했다. 대공 행렬이 시청을 향할 무렵 차량을 향해 폭탄이 날아왔지만 빗나가 폭발했다. 천운(天運)이었다. 뒤따르던 차량은 운이 좋지 못했다.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대공 부부가 부상자들을 위문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던 중 사달이 났다. 차가 진로를 바꾸기 위해 잠깐 멈춰 선 곳이 하필이면 또 다른 암살자 바로 앞이었던 것이다. 암살자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딱 두 발이었다. 그런데 그 두 발에 두 명이 죽었다. 대공과 대공비(大公妃). 당시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장차 다가올 1차 세계대전이란 거대한 비극을 낳은 죽음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죽다

상상해보자. 만약 당신이 5000만명의 신민을 거느린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라면, 유럽에서 가장 유서 깊은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장(首長)이 될 사람이라면 죽음을 직감한 순간에 무엇을 떠올릴까? 제국의 미래? 왕조의 운명? 신민의 행복?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에게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조피, 내 사랑, 죽지 마! 아이들을 위해서 살아야 해!"

죽음을 앞두고 있었으니 그의 말은 순수했을 것이다. 그의 뇌리에는 제국, 왕조, 신민, 그 무엇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아내와 아이들뿐이었다. 이해가 안 됐다. 무책임하다 느꼈다. 생각이 바뀐 건 아르트스테텐성(Artstetten Castle)에 다녀온 후였다. 대공의 여름 별장인 아르트스테텐성은 하(下)오스트리아의 바카우 계곡 근처에 있다. 성은 인적 드문 숲 속에 놓였는데 양파 모양의 청동 탑들과 붉은 지붕, 하얀 외벽이 조화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고즈넉하고 사랑스러운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찾는 이는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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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차기 황제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부인 조피와 함께 마차를 타고 행진하고 있다(1910년경). 두 사람은 황제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할 만큼 사랑했으나 그 사랑의 끝은 새드엔딩이었다. 동시에 둘의 죽음은 유럽이라는 문명 전체의 몰락을 알리는 대전쟁(1914~1918)의 시작이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성의 내부는 단아할 뿐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19세기 이래로 이곳의 성주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공들이었음을 감안하면 의외다. 이 성의 특징은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가족사진이 많다는 것이다. 나란히 걷는 부부의 사진, 뛰어노는 아이들의 사진, 함께 모여 있는 가족사진…. 군복을 입은 대공의 표정은 엄격하고 무뚝뚝하다. '사랑스러움, 인간적인 매력, 느긋하고 여유 있는 몸가짐처럼 대중의 인기를 얻는 데 중요한 모든 것이 결핍됐다'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가에 딱 들어맞는다. 대문호는 반(半)만 맞혔다. 대공의 그러한 장점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만 허락됐던 것이다. 그에게는 가족이 제일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세상과 싸우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1863년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황제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Ludwig·1833~1896), 어머니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공주인 마리아 안눈치아타(Annunziata·1843~ 1871)였다. 아버지는 가정적이었고, 정치와 무관하게 예술을 후원하고 다양한 작품을 수집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일찍 죽었지만 새엄마인 포르투갈 왕녀 마리아 테레사(Therese)도 좋은 엄마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당시 왕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자애로운 부모와 따스함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런 성장 환경이 대공에게 사랑과 가정의 소중함을 각인시켰을 것이다.


엄격한 황실과 자유로운 가정. 이 모순되는 배경이 대공의 삶을 규정지었다. 그는 엄격한 장교, 탁월한 사냥꾼, 열정적인 여행가로 자랐다. 그런 대공의 운명이 처음 바뀐 건 1889년 초겨울이었다. 황제의 외아들이자 사촌형이었던 황태자 루돌프(Rudolf·1858~1889)가 자살한 것이다. 기질과 정치적 견해가 아버지 황제와 달랐던 아들은 그 불화를 견뎌내지 못했다. 이제 제국의 계승권은 황제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카를 루트비히는 정치와는 담을 쌓고 살았기 때문에 차기 황제로 부적절했다. 사람들은 '사실상' 카를 루트비히의 장자(長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후계자로 인식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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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 암살 현장을 묘사한 그림(왼쪽)과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와 자식들의 묘역이 있는 ‘아르트스테텐’ 궁전. /위키피디아



대공의 운명을 바꾼 두 번째 사건은 오늘날 체코인 당시의 보헤미아에서 벌어졌다. 대공은 업무차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를 방문할 일이 많았다. 합스부르크 왕실의 방계에 속하는 대공녀 이사벨은 틈만 나면 대공을 프라하의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8명이나 되는 자신의 딸 중 누군가가 차기 황제의 눈에 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사벨은 설마 대공이 자신의 시녀 조피 코테크(Sophie Chotek· 1868~1914)와 사랑에 빠질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대공녀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고, 조피는 쫓겨났다. 대공은 자신의 사랑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결심과 함께. 다시 스캔들이었다. 황태자의 죽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고고한 합스부르크 황실의 가법(家法)은 같은 집안 혹은 유럽의 다른 왕실과의 결혼만을 허용하고 있었다. 조피도 보헤미아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황실 입장에서는 그래 봤자 제국의 변방인 보헤미아의, 그것도 공작도 아닌 백작 가문에 불과했다. 긴 왕조의 역사 속에 몇몇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공은 차기 황제였다. 황제가 될 사람이 이런 격에 맞지 않는 결혼을 하겠다고 '감히' 나선 경우는 없었다.


황실은 물론이고 제국 귀족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대공의 큰아버지인 노(老)황제의 분노가 가장 컸다. 전통의 수호자로 평생을 살아온 노황제에게 조카의 선택은 치욕에 가까웠을 것이다. 문제는 대공이었다. 그는 조피를 사랑했다. 그녀의 신분도, 자신의 미래도, 황제의 분노도, 고위 귀족들의 손가락질도 그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 앞에 무력했다.


모든 것을 버릴 각오를 한 사람을 누구도 이길 수 없다. 황제는 양보했고, 결혼은 허락됐다. 다만 조건이 붙었다. 대공은 황위를 이어도 그 자식들의 황위 계승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다. 가혹했지만 이게 최선임을 알았던 대공은 받아들였다. 둘은 1900년 7월 1일 결혼했다. 합스부르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사랑의 승리였다.


사랑하는 가족 곁에 묻히다


아르트스테텐 성 지도

대공의 가혹한 결혼 조건에는 묫자리에 대한 부분까지 있었다. 결혼 조건에 따르면 대공비와 그 후손들은 황실 무덤에 묻힐 수 없었다. 황실 가족은 모두 빈 시내에 있는 카푸치너 수도원 납골당에 묻히는데, 조피와 그의 아이들은 신분이 미천하기 때문에 불가능했다. 대공은 죽어서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카푸치너 납골당에 묻히는 대신 자신의 여름 궁전인 아르트스테텐을 안식처로 정했다. 대공 부부만을 위한 묘역은 성 구석의 지하에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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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초 이곳을 방문했을 때 대공 부부의 무덤을 보고 싶다고 하자 관리인은 "일손이 부족하니 직접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라"며 묵직한 옛 열쇠 꾸러미를 건네줬다. 오랜 세월의 무게가 차갑고 녹슨 열쇠를 타고 전해졌다. 성(城)을 따라 난 오솔길을 걷자 얼마 안 가 굳게 닫힌 철문이 나타났다. 열쇠로 자물쇠를 따고 들어가자 나란히 놓은 두 개의 석관이 보였다. 대공과 대공비였다. 자식과 손자의 석관도 보였다. 대공의 소망대로 그들은 모두 함께 있었다. 그들의 무덤을 찾는 이도 없고, 그들의 사랑을 기억하는 이도 없지만 무슨 상관일까? 두 사람이 함께 있는데.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랑과 함께.


사슴 6000마리, 영양 1000마리… 사냥으로의 도피


건(Gun), 글로리(Glory), 새드엔딩(Sad ending)….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이야기다. 그는 평생 총과 더불어 살았다. 군인 이전에 왕족으로서 사냥은 그의 일상이었다. 황제가 싫어하는 후계자였기에, 왕실이 인정하지 않는 결혼을 했기에 사냥으로의 도피는 더욱 잦았다. 그가 명사수였단 증거는 프라하 남쪽에 코노피슈테성(Konopiste Castle)에 남아 있다.


대공비의 고향인 체코에 마련된 이 성은 대공이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며 잡은 무수히 많은 사냥감의 박제품으로 가득하다. 호랑이, 곰 같은 맹수도 놀랍지만 '6000마리째'라 적힌 수사슴, '1000번째'라 적힌 영양, '100번째'라 적힌 독수리를 보고 있노라면 기가 질린다. 그러나 차기 황제로서 누린 영광은 짧았고, 대공은 암살자의 총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송동훈 문명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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