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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마음의 빚'도 빚인걸?

Nugurado 2018.09.21 19:12 조회 수 : 329

[삶의 한가운데 |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사람을 잃고 나면 청구서가 날아옵니다. 마음을 다치고 나면 나도 모르게 주판알을 튕겨보게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마지막에 돈의 일격을 받습니다. 사랑과 진심은 때로 돈을 이기지만, 사랑과 진심의 파편을 쓸어담은 자루에는 어김없이 가격표가 매겨집니다.

그 돈을 경계하는 지혜로운 방법은 뭘까요? 품위와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홍여사 드림

 자기야~ '마음의 빚'도 빚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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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안병현
"엄마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뭐든 둘이 좋도록 결정해."

식사하다 말고, 어머니가 불쑥 그렇게 말했습니다. 앞뒤 잘린 느닷없는 말이지만, 저는 이내 말뜻을 알아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지금 제 상견례 얘기를 하시는 겁니다. 장소든 날짜든, 어머니는 그저 결정되는 대로 따르겠다고 말입니다.

저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출근을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착잡한 표정은 한동안 마음에 걸리더군요. 둘이 좋도록 하라는 말이, 꼭 눈앞의 상견례에만 해당하는 건 아닐 겁니다. 결혼식과, 이후의 결혼 생활 전반에 관해 어머니는 이제 더는 어떠한 기대나 관심도 갖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쿨한 선언이 반가우면서도 씁쓸했던 것은, 그동안 어머니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짐작되기 때문이지요.

삼 년 전, 형의 결혼을 앞둔 어머니의 표정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기대와 설렘, 의욕이 가득했었죠. 부족함 없이 며느리를 환영하고, 매사에 배려하는 시어머니가 되고자 나름 노력하시는 게 제 눈에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형수와 어머니의 관계는 자꾸만 어긋나기 시작했을까요? 제가 보기에, 두 사람은 애초에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컸습니다. 어머니의 배려가 형수에게는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너그럽게 넘어갔다고 생각하지만, 형수는 잘못이라 느낀 적도 없습니다. 늦게 와도 이해해야지 생각했지만, 며느리는 나타나지 않았고, 전화만 한 통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벨은 끝내 울리지 않았습니다. 잘 지내보려는 사람과, 거리를 두려는 사람의 현격한 생각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당황하고, 실망했죠.

그 과정을 지켜보며 저 역시 착잡한 심경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왜, 아니다 싶으면 바로 포기하지를 못할까요?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과 인생에 대한 허무감까지 느끼는 이유는 또 뭘까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배경은 알 것 같았습니다. 쿨한 방향으로 즉각 경로 변경을 하기엔, 출발점부터 잘못돼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형의 신혼집을 마련해준 것부터가 잘못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저도 싫지만, 돈이 가는데 어떻게 마음이 안 갑니까? 돈을 댔으니 며느리를 내 맘대로 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내 생각과는 다른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 쉽게 포기가 되지는 않았던 겁니다. 두 분은 평생 힘들게 돈을 버신 분들입니다. 아들 가진 부모라면 제대로 된 신혼집을 장만해줘야 한다고 믿는 분들이었고, 그러지 못하면 며느리 앞에 당당할 수 없다고까지 생각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말은 뒤집어보면, 집을 마련해줬다는 자부심이 크다는 말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피땀 어린 자부심이 쿨한 고부 관계를 조금 더 어렵게 했습니다. 저희 결혼에 들어간 돈만 해도 얼마인데, 수억 들여 집을 사주고도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에 더욱 마음을 다치는 모양이었으니까요. 그러니 한번은 형이 형수에게 그랬답니다. 마음까지 쓸 필요는 없다. 부모님을 그저 중요한 고객이라고 생각하고, 최소한의 접대를 해 줄 수는 없겠느냐고요. 당신이 회사에서 잘하듯이. 그러자 형수가 그랬다네요. 솔직히 이 집, 당신 사준 것이지 나 사준 건 아니시잖아. 대접을 해도 당신이 해야지 왜 내가 해?

틀리고도 맞는 말, 말 되면서 안 되는 말에 저는 말문이 막힙니다. 똑똑한 형과 유능한 형수가 걸어간 그 길을 저는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부모님께 결혼 자금을 받지 않기로요. 일단 시작은 우리 둘의 힘으로 하기로 말입니다. 그러면 부모님도, 기대보다는 응원하실 거 아닙니까? 아들, 며느리한테 서운할 수는 있어도 배신감은 안 들겠지요. 여자친구 역시 한결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서로 당당히, 쿨하게, 세월을 지켜보다 보면, 아이도 태어나고, 관계가 안정되겠지요. 부모님이 마련해두신 돈은 받더라도 그다음에 받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도움 없이 시작하면, 몸 고생은 할 테고 초라한 출발이 될 수밖에 없을 테지요. 하지만 그편이 마음고생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실은 얼마 전, 저의 이런 생각을 여자친구에게 말했습니다. 그간 드러내지 않았던 집안의 분란에 대해서도 설명하면서 말입니다. 여자친구는 적잖이 당황해하더군요. 하지만 이내 말뜻을 이해하고 제 생각에 동의해주었습니다. 오빠 생각이 맞는 것 같다고요.

그런데 그 며칠 뒤 그녀는 저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이해하고 동의한다던 그녀의 생각은 그새 달라져 있었습니다. 오빠의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밤새 생각하고야 깨달았다네요. 어째서 나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고부 갈등이라는 낡은 틀에 끼워 맞추려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믿지 못한다면 그게 사랑이냐고요. 또한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하나 주고 하나 받는 식이냐고 합니다. 서로 진심으로 배려하고 노력하면 되지 왜 돈을 결부시켜 계량하려 하느냐고요. 저한테 실망했다고 하네요.

원망 가득한 메시지를 읽고 한편 미안하면서, 한편 답답합니다. 저는 여자친구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진심이니 배려니 도리니 하는 말을 더는 못 믿는 겁니다. 사람마다 도리의 기준이 다르고, 배려라는 것도 다 상대적임을 뼈저리게 알았으니까요. 이제 제가 믿는 건 눈에 보이는 공간적 거리와 손에 잡히는 돈입니다.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 상처 받지 않으려면, 거리를 띄우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키지 않는 일을 강요받지 않으려면, 돈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지금 관계에 돈을 결부시키려는 게 아니라, 돈으로부터 우리 관계를 멀찍이 보호하려는 것인데…. 그녀는 아직 결혼의 씁쓸한 맛을 못 봐서 이해 못 하는 것일까요?

답장을 쓰다 지우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오늘입니다.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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