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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배신] [Cover story] '백 마디 말보다 한방울 눈물이 강력한 무기'는 옛말… 이젠 눈물을 삐딱하게 본다
/일러스트= 안병현
회사원 김현정(33·가명)씨는 사무실에서도 자주 눈물짓던 '울보'였다. "일하다 울고, 회식하다 울고…. 한 달에 한두 번은 그랬던 거 같아요." 직장생활 거의 10년이 다 돼가지만, 본격적으로 고민이 된 건 올 초쯤. 주변에서 "불리할 때마다 툭하면 울지 않느냐"고 흉보는 걸 알게 된 뒤였다. 그는 "그 뒤론 안 좋은 별명이라도 생길까 봐 눈물이 나면 도망치듯 숨거나, 코를 풀거나 하면서 억지로 가라앉힌다"고 했다. "숨는 것도 한두 번이지 정말 죽을 맛이에요. 머릿속은 화로 가득 차 있는데 눈물은 흐르고,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 생각하면 수치심까지 들고….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요."
대학생 이영호(21·가명)씨는 "너무 자주 우는 친구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했다. "특히 술만 마시면 자기 콤플렉스든 여자 친구든 뭐든 이야기하면서 꼭 울어요. 당장 다음 날만 돼도 '별거 아니었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는 "보고 나오면서 울 게 뻔해서" 요즘엔 같이 영화도 안 본다고 했다.
그동안 눈물은 한국인을 이해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다. '한국인을 대표하는 정서는 해학과 눈물'이라는 말이 있다. 영화학자 이호걸은 저서 '눈물과 정치'에서 "한국인들에게 지난 세기는 눈물의 힘으로 살아낸 '눈물의 시대'"라며 "한국인의 눈물 애호가 유별났던 건 한국인의 일상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눈물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요즘 심상치 않다. 곳곳에서 눈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우는 이를 보고 측은지심(惻隱之心)만큼이나 의구심이나 경계심을 품기도 한다. friday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를 통해 전국 20∼50대 남녀 84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40.3%가 '최근에 우는 사람을 보고 싫다고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행복한 눈물’을 패러디한 그림.
슬픔, 감동, 반성, 진정성, 분노…. 그동안 백 마디 말보다 한 방울 눈물이 대신 전해주던 것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젠 눈물이 싫어지려고 한다'는 이유가 그것들과 맞닿아 있다. 슬프거나 감동해서 눈물 흘리는 것은 "별일 아닌데 울음을 터뜨린다"고 보이거나(30.6%) "감정 조절을 못 한다"는 느낌이 들어(21.1%) 싫다고 한다. 울음 섞인 말투로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고 있다'고 하거나, 숨겨진 피해 사실을 밝히면 "일부러 우는 것 아니냐"(31.2%)며 눈물에 담긴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바야흐로 눈물의 수난시대다.
눈물은 항상 눈에 맺혀 있지만, 사람들은 눈물이 눈에서 많이 나와 흘러내릴 때 비로소 눈물이라고 부른다. 눈물은 슬플 때뿐만 아니라 기쁘거나 화가 날 때에도 나온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은 ‘열하일기’ 중 ‘호곡장론(好哭場論)’에서 “사람은 칠정(七情)이 극에 달하면 울게 된다”며 “모든 감정의 끝은 눈물”이라고 했다.
눈물이 주요한 의사소통 수단인 아이들도 ‘가짜 울음’을 쓰는 경우가 있다. 중간에 울음을 멈추고 부모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울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을 때, 부모의 주의를 끌고 싶은 때, 심지어 그냥 심심할 때도 가짜로 운단다./게티이미지 코리아
이렇듯 한국인은 예든 지금이든 눈물과 친했다. 인터넷 세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입보다 눈으로 표정을 읽는 한국인들에게 눈물은 ‘슬픔’ 하면 떠오르는 대명사였다. 눈물 흘리는 모습을 나타낸 ‘ㅠㅠ’ 이모티콘은 PC 통신 시절부터 남녀노소 가장 많이 쓰는 표현 중 하나다. 10∼30대들의 채팅을 보면 과장 좀 보태서 글자 절반이 ‘ㅠ’일 정도. 최근엔 ‘눈물’ ‘폭풍눈물’ 글자를 거꾸로 뒤집은 ‘롬곡’ ‘롬곡??’ 등이 유행이다.
사람들이 문제 삼기 시작한 눈물은 이 중 주로 슬픔의 눈물, 그중에서도 남의 슬픔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내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다. 그뿐만 아니다. 남이 우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남이 나를 울게끔 하는 것도 더는 유쾌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감동을 주려는 콘텐츠는 자칫하면 ‘감성팔이(감성을 내세워 팔아먹는다는 뜻)’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최근 대흥행한 영화나 드라마들도 그 이면에 ‘신파’ ‘억지 눈물’이라는 딱지가 거세게 따라붙고 있다. 한국인은 어쩌다 눈물을 삐딱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걸까.
계속되는 눈물 논란
오랜 격언에 나오듯 눈물은 한때 가장 강력한 무기로 통했다. 동정심을 얻으면서도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매개체였다. 이젠 예전처럼 통하지 않는다. 눈물을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늘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비하하는 표현인 ‘즙’이라는 신조어는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얼굴을 찡그리며 우는 모습이 꼭 과일에서 즙 짜내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며 붙인 표현. 울음을 터뜨리는 걸 가리켜 ‘즙 짠다’ ‘착즙한다’고 하며, 드라마나 예능에서 감동적 장면을 연출하려 하면 ‘즙 타임’이라고 빈정대는 식이다. 1∼2년 전 등장해 연예인, 정치인, 범죄자 등을 향해 주로 쓰이던 이 표현은 최근 일상으로도 번지고 있다. 몇 달 전부터는 ‘먼저 울면 무조건 이긴다’고 비꼬는 ‘선(先)즙필승’ 같은 표현도 유행이다.
‘여자의 눈물은 무기’라는 속설은 점점 깨지고 있다. 96명의 한·일 참가자가 등장해 겨룬 Mnet ‘프로듀스48’의 일부 시청자는 프로그램에 ‘즙로듀스’라는 별명을 붙였다. ‘출연자들이 하도 많이 울어서 꼴 보기 싫다’며 붙인 것. 남성 참가자들이 나온 전작 ‘프로듀스 101 시즌2’ 때도 ‘출연자들이 너무 많이 운다’는 평이 나왔으나 이번에 유독 악평이 많았다. 어떤 시청자는 울음 순서대로 출연자 간 순위를 매기기까지 했다. 총 12회 방송분에서 13번 운 참가자가 1위를 기록했다. 울음 순위 ‘톱 11’ 중 6명이 투표에서 탈락해 데뷔하지 못했다.
Mnet ‘프로듀스48’의 참가자들은 참 많이도 울었다. 이겨도 울고, 져도 울고, 데뷔 성공해서도 울었다. 한 시청자의 집계에 따르면 13번 운 참가자도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동정파와 비난파로 나뉘었다./Mnet
이제 눈물로 면죄부를 받거나 죗값을 감경하긴 어렵다. 울어서 오히려 더 비난받는 사례가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 5월 ‘갑질 논란’에 휩싸인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는 경찰에 출석해 포토라인 앞에서 울먹였고, 조사실로 올라가던 중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흐느꼈다. 그러나 여론은 더 나빠졌고, 네티즌들은 “눈물에 속지 말자. 눈물 흘리는 걸 연습하고 나왔을 것” “그저 자존심 상해서 우는 것 아닌가” 등의 댓글을 달았다.
인기 아이돌 EXID의 하니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눈물을 너무 자주 흘려 팬들에게 혼이 났다. 가요 프로그램 시상식에서 울고, 크로켓을 먹다가 “어렸을 때가 떠오른다”며 우는 등 자주 눈물을 보인 게 화근이었다. 한 프로그램 제작진이 나서 ‘편집 때문에 뜬금없어 보인 것’이라고 감싸기도 했다. 관련 기사에선 “다음부턴 우는 장면은 전부 편집하라”는 댓글이 추천 수천 개를 받았다. 운동선수들에게도 눈물로 인한 낙인이 따라다닌다. 인터뷰나 경기 중 눈물을 보인 야구선수 한동민, 김지용 등이 대표적. ‘페이커’라는 닉네임으로 잘 알려진 프로게이머 이상혁씨도 지난해 대회 결승에서 패한 뒤 눈물을 흘렸다. 전 세계에서 신(神)으로 추앙받는 그도 비난 세례를 피할 수 없었다.
눈물이 빠지지 않던 장소에서도 눈물이 전보다 줄었다. 장례식장에서 곡(哭)소리 듣기 어려워진 것이 그 예. 감동적 멘트와 음악으로 학생들 눈물 쏙 빼던 학교나 교회 수련회의 촛불 의식도 최근 사라지는 추세다.
‘눈물의 배신’과 ‘억지 감동’
한국인들은 왜 눈물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까. 먼저 최근 연이은 ‘눈물의 배신’이 한몫했다는 의견이 있다. 갖가지 이유로 눈물 흘렸던 이들의 배신이 곧 눈물에 대한 인식 변화로 이어졌다는 시각이다. 일례로 코미디언 신종령은 지난해 폭행 사건을 일으킨 뒤 “죄송하다”며 방송에서 눈물 흘렸으나, 그 방송이 전파를 탄 날 또다른 폭행으로 경찰에 입건됐다. 정봉주 전 의원은 성추행 의혹을 받던 중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하며 눈물 흘렸으나, 곧 출마를 철회했다. 고강섭 한국청년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행위자들이 눈물의 의미를 재구성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정치인 등 유명인, 특히 물의를 일으킨 이들이 흔히 눈물부터 흘리는 모습이 반복됐다”며 “그러다 보니 순수성과 같은 눈물의 사회적 의미가 침착되고 변질됐다”고 했다.
‘억지 감동’이라고 불리는 콘텐츠에 대한 반발감과 피로감도 영향을 줬다. 흥행작인 영화, 드라마 등에서도 엄숙한 음악이 흐르고 엉엉 우는 배우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에는 ‘억지 눈물’이라는 딱지가 계속 따라붙는다. 작년 말 개봉한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이 대표적이다. 1400만 관객을 달성했지만 한편으로는 ‘대놓고 신파’라는 비판도 받았다. 한 영화 리뷰 사이트에는 “관객들을 울리려는 강박” “눈물이 나올 때까지 얻어맞는 것 같다”는 등 악평이 많은 추천을 받았다. 김치호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감동은 콘텐츠를 구성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라며 “콘텐츠를 비판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적 현상인 만큼, 그 속의 감동 코드에 대해서도 비판이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영화학자 이호걸은 저서 ‘눈물과 정치’에서 “1990년대 들며 고생의 시대가 막을 내렸고, 이제 신파적 눈물의 시대는 끝났다”며 “특히 40대들은 부모 세대에 비해 눈물을 적게 흘리는 성향을 갖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그는 “슬픔과 수치심보다는 행복과 자부심이 좋은 상태”라며 “이제는 눈물보다는 웃음이 요청된다”고 했다.
“눈물, 너무 비난하진 말아야”
/게티이미지 코리아
눈물에 대한 부정적 분위기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용복(59)씨는 “나도 카톡으로 좋은 글귀나 사연을 보면 코끝이 찡해져 눈물 삼킬 때가 있는데,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은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쏟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최민준(28)씨는 “우는 걸 보면 ‘또 울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내가 저 사람의 감정에 제대로 공감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당사자 입장에선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낯선 감정일 수도 있다. 보는 사람이 알아서 눈물을 필터링해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즙 짠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이젠 우는 걸로도 욕을 먹어야 하느냐. 너무하다”는 사람과 “진실성 없는 눈물만큼 배반당했다는 감정을 주는 것도 없다”는 사람들이 대립한다.
실제로 평소 울고 싶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고, 많은 이가 남몰래 울고 있다. friday 설문에서 응답자의 67.8%가 “평소 울고 싶을 때가 있다”고 했다. 응답자의 53.4%는 “최근 남몰래 운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중 55.3%가 ‘언제 울었나’라는 질문에 “한 달 내”라고 답했다. 총 응답자의 약 30%가 “최근 한 달 내에 남몰래 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슬픔의 눈물이 비난받게 된 건 아니다. 어떤 눈물은 여전히 연민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칭찬받기도 한다. 고강섭 연구원은 “같은 축구선수 손흥민의 눈물이라도 월드컵 때와 아시안게임 때의 평이 다르듯, 눈물이 상징하는 바는 그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전달되기 마련”이라고 했다. 눈물이 아직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라는 점에서 눈물을 통한 감정 표현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어울릴 것”이라고 했다. 김치호 교수는 “눈물이나 감동 콘텐츠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전면에 드러나지만, 이를 여전히 별말 없이 수용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