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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하는 가을 여행
바람 타는 계절… 그대의 배낭엔 어떤 책 넣었나요
구름 자취 변화무쌍한 파란 하늘이 어딘가로 떠나보지 않겠느냐고 꼬드긴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에 먼 곳으로의 향수(鄕愁)가 가슴을 스친다. 바야흐로 여행의 계절, 책의 계절이다. 각 분야 독서가들이 역사·예술·음식·자아찾기 여행을 주제로 3권씩 추천했다. 이 가을, 홀연히 떠나면서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낯선 곳에서 나를 낯설게 바라보기
여행에 대한 강의를 할 때마다, 독자들의 눈빛에서는 '당장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 독자들에게 나는 정보 중심의 여행 책자보다는 여행자의 감수성이 듬뿍 묻어 있는 에세이집을 소개해주고 싶다.
그 첫 번째 책은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다. 위험과 공포로 가득한 사하라사막에서, 그 누구도 밟지 않은 땅을 첫 번째로 밟는 짜릿한 희열을 느낀 비행기 조종사 생텍쥐페리의 자전적 이야기다. 이 책에서 나는 관광과 비행이 대중화되기 이전, 좀 더 불편하고 느렸지만 그리하여 더더욱 낭만적이고 원초적이었던 여행자의 열정을 발견한다. 안데스산맥에서 조난당했다가 기적적으로 생환한 친구 기요메, 사하라사막에 불시착했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온 생텍쥐페리의 이야기는 여행과 탐험, 방황과 모험이 결국 하나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생동감 넘치는 체험으로 가득하다.
두 번째 추천 도서는 리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이다. 나는 비행기나 버스, 기차를 탈 때보다 걷고 있을 때 진정한 여행의 참맛을 느낀다. 이 책 또한 반드시 걸어야만 보이는 것들, 끝없이 걷고 또 걸음으로써 비로소 달라 보이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세 번째 추천 도서는 인류학자 로렌 아이슬리의 자서전 '그 모든 낯선 시간들'이다. 그의 여행은 행복을 위한 여가활동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화물열차와 우편열차에 닥치는 대로 올라타며 사막을 가로지르고, 흔들리는 열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노끈으로 손목과 열차를 묶고 네바다 사막을 횡단하며, 그는 생존의 길을 향해, 학문의 길을 향해 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그가 도달한 곳은 평생 '여행할 권리'를 잊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라는 보이지 않는 종착역이었다.
건조한 상태에서는 보잘것없지만 따스한 찻물 속으로 들어가면 오색찬란한 꽃봉오리를 만화방창하게 피워내는 꽃차처럼, 여행은 꼬깃꼬깃 구겨져 있던 내 감성의 날개를 화려한 공작새의 날개처럼 활짝 펼쳐내는 천연의 항우울제다. /정여울 작가·문학평론가
전봉관 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400년 역사 도쿄의 유적부터 요리까지
도쿄는 볼거리·즐길거리 넘치는 매력적인 도시다. 하지만 에도(江戶) 막부가 출범한 1603년부터 400년 이상 사실상 수도 역할을 담당했던 이 유서 깊은 도시에서 역사 유적을 찾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에도 시대의 흔적이, 1945년 미군의 공습으로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흔적이 잿더미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도쿄 한복판에는 히가시교엔(東御苑)이라는 왕실 정원이 있다. 과거 에도성 자리에 있는 이 정원은 세계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으로 손꼽히는 지역의 땅을 53만㎡나 차지하고 있다. 잘생긴 바위로 쌓아올린 석벽과 석대, 소박한 목조 건물 몇 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공간은 텅 빈 잔디밭이다. 과장해서 말하면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얼룩진 도쿄로의 역사 기행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과거의 흔적을 더듬는 것일 수밖에 없다.
가도이 요시노부의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미개발지였던 간토(�東) 8주를 하사받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 후계자들이 강줄기를 바꾸고, 화폐를 주조하고, 식수를 끌어오고, 석벽을 쌓는 등 260년간 지속된 대역사를 통해 에도라는 거대 도시를 건설해내는 과정을 그린 역사소설이다. E 사이덴스티커의 '도쿄이야기'는 수세기에 걸쳐 피땀 흘려 건설한 에도가 관동 대지진으로 종말을 고하고 그 자리에 근대도시 도쿄가 건설되는 과정과 그 시대의 문화를 다양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소개한 책이다. 이런 책과 함께하면 잔디밭 위에 휑하니 놓인 히가시교엔의 바윗덩이에 어떠한 역사가 서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오카다 데쓰의 '돈가스의 탄생'은 메이지 유신을 '요리의 유신'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 책이다. 무려 1200여년 동안 육식이 금지되었던 일본에 육식이 허용된 것은 메이지 5년. 서양 요리를 일본식으로 변용한 돈가스·카레라이스·고로케 등이 등장한 것도 그때 이후였다. 요리에 담긴 역사를 알아간다면 도쿄의 식도락 여행도 훌륭한 역사 기행이 될 수 있다.
임형남 건축가
오래된 집, 골목의 향기를 찾아
원체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직업이 건축가이다 보니 집을 설계하고 짓기 위해 전국을 무척 많이 돌아다닌다. 예전에는 직접 차를 몰고 돌아다녔지만 요즘은 기차나 버스가 많이 편리해져서 현장에 갈 때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동 중에 음악이나 책을 읽으며 목적지까지 갈 수 있어 더욱 좋다. 일을 보고 늘 현장 주변에 있는 오래된 옛집이나 동네 골목을 돌아다닌다. 그러다 보니 오래된 동네 이야기나 집 이야기가 있는 책을 많이 본다. 그중 권하고 싶은 책이 몇 권 있다.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부산'. 이 책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쓰는 동네 이야기책이다. 전국이 시리즈로 나올 모양인데 특이하게도 부산은 부산 출신이 아닌 부산 사람이 썼다. 짧은 호흡의 글들이 촘촘히 박혀 있어서 쉽게 책장이 넘어간다. 그리고 이야기가 능수능란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과 한가한 오후에 햇볕 쬐며 부산을 걸어 다니는 것 같다.
'파리발 서울행 특급열차'. 저자 오영욱은 건축가이고 일러스트레이터이다. 그리고 책을 무척 많이 낸 작가이기도 하다. 어느 날 갑자기 기차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해서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서 북한을 통해 우리나라로 오는 여행을 한다. 물론 신의주, 평양, 개성을 거치는 북한 여행은 그의 상상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재미있는 삽화가 중간 중간 끼어들어 무척 유쾌하지만, 또 중간 중간 깊은 성찰이 들어 있어 가볍지 않다.
'김봉렬의 한국 건축 이야기'. 한국 건축사를 연구하는 학자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인 김봉렬 교수가 한국 건축을 집대성한 이야기책이다. 오래된 살림집부터 오래된 마을 그리고 절집 등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들이 총망라돼 있다. 한국 건축을 답사할 때 늘 곁에 두고 답안지 맞추듯 그 책을 꺼내 들고 되새겨본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엄숙하면서도 가끔 비틀어주는 학자다운 유머로 풀어준다. 책을 읽다 보면 한국 건축의 정신이 보인다.
이용재 음식평론가
어리굴젓이든 타르틴빵이든
폭염에 도망쳤던 입맛이 본격적으로 돌아오는 계절, 맛 기행을 위한 책 세 권을 골라 보았다 .
박찬일 셰프가 쓴 '노포의 장사법' 은 전작인 '백년식당'과 더불어 한국의 노포를 찾아 나설 때 가장 유용한 책이다. 양식을 넘어 자신의 한식 세계를 확장하고 있는 요리사가 직접 발품을 팔아 쓴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가치를 지닌다. 고기부터 생맥주, 분식에 이르는 다양한 메뉴를 아우를 뿐 아니라 상당수 서울 시내의 음식점에 대해 다루고 있다. 소개하는 음식만큼이나 맛이 좋은 그의 글을 읽어가면서 찾아가보고 싶은 음식점을 골라 지도 위에 좌표를 찍고 여정을 계획하는 재미가 쏠쏠할 것이다
나는 경기도 수원이 고향이지만 충청남도 예산은 내게 맛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양가 조부모댁이 근거를 두었던 까닭에 어린 시절 한참 살았으며, 차례나 잔치 음식으로 한식에 대해 생각할 계기도 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서점을 뒤지다가 우연히 '충남푸드투어'라는 책을 발견했다. 완성도가 뛰어나지는 않고 소개하는 음식점의 선정 기준도 크게 믿음이 가지는 않지만 충청도 음식이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어리굴젓(서산), 한우(예산), 게국지(태안) 등 지역 음식을 소개한 정보만큼은 나름 의미가 있다
'타르틴 브레드―세상 모든 빵으로 통하는 타르틴 베이커리 단 하나의 기본 레시피'를 쓴 채드 로버트슨은 샌프란시스코 소재 '타르틴 베이커리'의 주인이자 제빵사로 현재 가장 혁신적인 빵을 만드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마이클 폴란의 '요리를 욕망하다'에도 소개된 바 있다. 자연 발효종을 써 맛은 복잡하고, 수분 비율이 높아 출렁이는 반죽을 구워 껍데기는 바삭하고 촘촘하지만 부드러운 속살의 빵이 그의 전매특허다. 원래는 샌프란시스코에서만 맛볼 수 있었지만 최근 서울 이태원에도 진출했으니 타르틴 베이커리의 빵 맛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읽어볼 만할 책이다. 살아 있는 효모와 불을 다루는 이야기가 구도자의 여정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