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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흔든 전투의 역사|유필하 지음|들녘|648쪽



1935년 히틀러가 베르사유조약 탈퇴를 선언할 때만 해도 유럽 국가들 중 누구도 2차대전 개전 초기 독일이 그토록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 눈에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에 짓눌린 1차대전 패전국일 뿐이었다.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독일군은 단 48시간 만에 오스트리아 빈을 점령했고, 이어 100만 대군이 저항하는 폴란드 바르샤바를 28일 만에 함락시켰다. 비결은 탱크의 기동력을 앞세운 기갑전. 현대 기갑전의 선구자로 꼽히는 독일 장군 하인츠 구데리안은 차량화 부대를 기동전의 주역으로 삼아 적의 심장부에 단숨에 뛰어드는 방식으로 빛나는 승리를 이끌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가장'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역사적인 전투 25개를 골라 발단과 전개, 승패 원인을 상세히 설명한다. 역사상 가장 많은 포로를 낳은 전투 기록은 2차대전 중 키예프에서 작성됐다. 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한 독일은 나폴레옹의 실패 사례를 연구해 '쐐기와 함정'이란 뜻의 카일 운트 케셀(Keil und Kessel) 작전을 준비했다. 
알렉산드로스와 한니발 이래 전술의 상식이 된 양익(兩翼) 포위 전술에 기갑부대를 앞세우는 전격전을 결합한 이 전법으로 독일은 무려 66만명에 이르는 키예프 주둔 소련군을 포로로 잡았다.

가장 큰 병력 차(差)를 딛고 승리한 싸움은 스페인 정복자 코르테스가 아즈텍과 맞붙어 이긴 오툼바 전투(1520년)다. 400명으로 4만명을 꺾었으니 전선 13척으로 열 배 넘는 왜선을 격파한 명량해전을 압도한다. 이 승리의 비결도 속도전이었다. 코르테스는 보병이 적과 대치하는 사이 기병 23명을 이끌고 적 수뇌부로 달려들어가 사령관을 창으로 찔러 쓰러뜨렸다.

패배를 자초한 인간적 약점들을 찾아 읽는 재미도 크다. 히틀러가 초반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구데리안 같은 명장을 여럿 발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탁 이유가 졸렬했다. 오스트리아 평민에 사병 출신인 히틀러는 평민 장군인 구데리안의 말을 경청했다. 
반면 군부의 다수를 차지했던 프로이센 귀족 출신 장군들 말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열등의식에서 비롯된 용인술은 2차대전의 향방을 가르게 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75만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참패로 귀착됐다. "소련군에 포위당하기 전에 잠시 철군해야 한다"는 장군들 조언을 무시한 대가였다.

50여 컷의 진형도와 전황을 설명하는 풍부한 그림들이 현장감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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