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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세 세계 최고령 모델 박양자
11년 차 베테랑 시니어 모델
“망설이지 말고 부딪히세요”
2017년 5월 서울 동대문 패션타운 옆 청계천에 무대가 길게 놓여있다. 무대를 밝히는 조명이 켜지자 흥겨운 음악에 맞춰 모델들이 등장한다. 키 180cm, 날씬한 몸매, 굽 높은 신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델 대신 160cm 정도 키에 굽 낮은 신발을 신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능숙하게 무대를 누빈다. 머리카락이 새하얀 할머니 모델이 등장하자 관객 박수 소리가 커진다. 바로 올해로 만 91세를 맞이한 시니어 모델 박양자씨다. 기네스북에 최고령 모델로 등재돼 있는 카르멘 델로피체(Carmen DellOrefice·87)보다 4살 더 많다.
박씨는 11년 차 베테랑 시니어 모델이자 세계 최고령 모델이다. 1년에 약 10번 정도 패션쇼 무대에 선다. 80세가 되던 해 가슴에 품고 있던 꿈을 이루고자 뉴시니어라이프 시니어 모델 1기에 지원했다. 뉴시니어라이프는 실버세대를 위한 사회적 기업이다. 모델 교실, 패션쇼, 이벤트 등을 열어 실버세대가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 1년에 20회 정도 패션쇼를 주최한다.
2007년부터 뉴시니어라이프에서 교육받은 시니어 모델만 2000여 명이다. 120명이 패션 모델, 재연 배우, 광고 모델 등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박씨도 그중 한 명이다. 워킹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시니어 모델 박양자씨를 만났다.
박양자씨
◇하고 싶은 일은 가슴 속에 묻고
박양자씨는 192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박씨는 또래보다 활발했다. 운동과 무용을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하고 싶은 걸 마음 껏 할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고 한다. "제가 어릴 때 만해도 장래희망 같은 건 없었어요. 나라 밖으로는 태평양 전쟁이 있었고 우리나라도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어요. 6.25 전쟁도 겪었으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학교 다니다가 나이가 차면 시집을 가는 게 전부였습니다."
20살 때 시집을 갔다. 그때부터 한 남자의 아내와 5남매 엄마로서 살았다. 춤과 옷에 관심이 많았지만 가슴 속에 묻고 혼자 간직했다. 집에 있을 때나 잠깐 밖에 나갈 때 신경 써서 옷을 입는 것이 전부였다. 자녀들이 모두 커 결혼을 하고는 손자를 돌봤다.
◇시니어 모델‥제2의 박양자를 만들다
어느덧 30대가 된 손녀의 아들까지 보고 직접 돌봤다. 박씨의 나이 80세. 온전히 나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증조할머니 역할까지 다 했으니 내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자손들 뒷 모습 쳐다보지 않고, 전화 언제 오나 기다리지 않고 내 생활을 찾고 싶었죠. 2007년 5월 신문을 읽다 시니어 모델 1기를 구한다는 공고를 봤어요. 공고를 보자마자 바로 뉴시니어라이프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동네 동생들과 함께 사무실에 도착하니 10여 명의 할머니가 모여있었다. 그중 박씨가 나이가 가장 많았다. 나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박양자씨는 처음하는 도전이었지만 쑥스럽지 않았다고 말했다. 항상 하고 싶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델 교실서 기초과정부터 배웠다. 허리 펴는 법부터 걷는 자세 등 기본기를 다졌다. 평소 체조로 체력관리를 해서 힘들지 않았다. 취미로 스포츠 댄스를 배운 덕에 모델 교실을 꽉 채우는 큰 소리의 음악도 시끄럽지 않았다. "음악이나 워킹 방법에 쉽게 적응했어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었지만 신나서 하니까 몸이 절로 따라줬습니다."
모델 교실에서 기초 과정 수업을 받고 있는 시니어 모델
◇뿌듯했던 첫 무대 이제는 10년 차 베테랑
4개월 정도 교육을 받은 박씨는 2007년 9월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국제 실버 박람회 시니어 패션쇼 정식 시니어 모델로 데뷔했다. 뉴시니어라이프에서 주최한 시니어 패션쇼에서 세 벌의 옷을 선보였다. 그는 "첫 무대였지만 떨리지 않았다"면서 "실수 없이 무대를 마치고 나니 인생에서 처음 느끼는 뿌듯함이 밀려왔다"고 말했다.
이후 자신감을 얻어 셀 수 없이 많은 무대에 올랐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2013년 청계천에서 열린 '청계천 수상 패션쇼'였다. 시니어 모델 40명이 참가하는 큰 무대였다. 박씨가 처음으로 야외무대에 오른 날이기도 했다. 데뷔 무대에서도 떨지 않았지만 그때는 무서웠다고 한다.
"평소보다 런웨이도 길고 양옆으로는 조명에 비친 물이 반짝였어요. 처음엔 아찔했죠. 워킹을 시작하니 무서운 게 싹 사라지더군요. 야외무대라 평소보다 쇼를 보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저처럼 하얀 머리를 한 할머니들이 나오면 박수도 더 많이 쳐줘서 힘이 났죠." 모델교실 개근은 물론 집에서도 워킹과 포즈 연습으로 아직 무대에서 실수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양한 무대에 오르다 보니 어느덧 10년째 베테랑 시니어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뉴시니어라이프에서는 시니어 모델이 무대에 서는 것을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따로 모델료를 지급하진 않는다. 단, 재연배우, 광고 모델, 방송 출연 같은 개인 활동에서 오는 수입은 있다. 활동마다 다르지만 적게는 5만원부터 많게는 500만원까지 벌기도 한다.
다양한 무대 위 박씨의 모습 / 뉴시니어라이프 제공
◇시니어 모델의 우상.."부딪혀보세요"
11년 동안 건강하게 모델 활동을 할 수 있는 비법으로 꾸준한 운동과 우유 두 잔을 꼽았다. "40년 동안 매일 아침 30분씩 체조를 해요. 칼슘약 대신 하루에 우유 두 잔을 꼭 마십니다. 휴식도 중요해요. 화요일 수업을 들으면 수요일엔 아무 활동하지 않고 집에서 쉽니다."
2016년 3월, 박양자씨는 시니어 모델 동료들과 함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집에서 우연히 박씨의 모습을 본 이복순(74)씨는 그날부터 시니어 모델의 꿈을 꿨다. 1년 후 용기를 내서 모델 교실 문을 두드렸다. 일주일에 한 번, 충남 당진에서 서울까지 와서 수업을 들었다. 처음엔 지팡이 없이 10m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수 개월간의 연습을 거쳐 당당히 무대에서 모델의 꿈을 펼쳤다.
박씨는 누군가에게 롤모델이 되는 것이 쑥스럽다고 하면서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조언도 있지 않았다. "망설이지 말고 용기를 내세요. 부딪혀 보는 겁니다. 저는 한 번의 용기로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 다른 건 필요 없고 건강이 다 하는 날까지 모델 일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