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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8일 오후 5시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 금발의 외국인이 눈을 가린 채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 주인공은 러시아 옴스크 지방에서 온 배낭여행자 데니스(25)다. 그의 옆에는 '당신은 나의 여행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는 문구를 적은 종이와 돈을 넣는 모자가 있다. 데니스는 "400달러(약 43만원)로 세계 여행을 시작해 여행비 마련을 위해 하루 3시간씩 프리허그를 하고 있다"며 "한국이 좋아서 왔는데 언제까지 여행을 계속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옆에 있던 친구 블라디슬라프(24)와 번갈아가며 프리허그를 했다. 이들은 3개월 전 여행을 시작해 카자흐스탄, 홍콩, 마카오를 거쳐 6일 전 서울에 도착했다고 한다. 프리허그로 하루에 얼마를 버는지는 "밝힐 수 없다"고 답했다.
구걸하는 배낭여행객, 베그패커(begpacker)
최근 유동인구가 많은 홍대입구, 인사동, 명동 등 관광지에는 이들 같은 '베그패커(begpacker)'가 늘고 있다. 베그패커는 '구걸하다'는 뜻의 영어 'beg'와 '배낭여행객'을 뜻하는 'backpaker'의 합성어로 '구걸을 통해 여행비를 버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들이 여행경비를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앉아서 구걸하는 것 뿐 아니라 직접 만든 액세서리나 직접 찍었다고 주장하는 사진을 판매한다. 이날 터키인 엠레(21)는 홍대 인근에서 직접 만든 팔찌를 팔고 있었다. 가격은 원하는 만큼 내면 된다. 아시아 여행 중이라는 그는 "3000달러(약 322만원)로 여행을 시작해 7개월 동안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등 5개국을 여행했다"며 "오늘은 두 시간 동안 팔찌 3개를 팔아 1만5000원을 벌었다"고 말했다.
낭만적이다 vs 무책임한 행동
곳곳에서 구걸하거나 노상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베그패커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엇갈린다. 직장인 서은지(22)씨는 "돈이 없는 청춘들도 얼마든지 여행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에 낭만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면 취업준비생 김지혜(32)씨는 "예산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외국에서 구걸 등을 하며 여행경비를 마련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이들 베그패커들은 대부분 유럽, 북미 등 서양인이라는 점도 특징이다. 취업준비생 이경화(24)씨는 지난 4월 서울 강동구에서 한 외국인으로부터 '나는 청각장애인으로 여행비를 마련 중이니 태극기를 3000원에 사달라'고 적힌 종이를 받았다. 이씨는 "금발의 20대 백인 남성이 실제 청각 장애인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전했다.
회사원 김민성(30)씨는 "러시아에서 온 20대 초반 커플이 판매하는 사진은 관광 책자에 나오는 전문 사진가가 찍은 느낌이었다"며 "흑인이나 동남아시아인이 아닌 백인들이 한국인들이 자신들에게 호의적이라는 점을 이용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동남아에선 사회적 논란, "한국인, 백인들에게 호의적인 것 알아"
베그패커들은 최근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들이 거짓 사연으로 구걸을 하거나 '여행 경비를 마련한다'며 받은 돈을 유흥비로 탕진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에 태국은 지난해부터 관광객 비자를 받은 여행객이 반드시 1인당 현금 2만바트(약 67만원)를소지해야 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지난해 8월 베트남에서는 구걸하는 백인 사진이 온라인에 퍼지자 베트남 끼엔장 지방 관광 당국이 "베트남에서 구걸 행위는 금지"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늘어나는 베그패커들에 대해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서양인들에게 무전여행은 일종의 문화"라면서 "백인들이 아시아를 비교적 만만하게 여기고, 한국 사람들도 이들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베그패커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흑인이나 동남아인들이 이들과 같은 행동을 했을 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똑같이 친절하게 대할지는 의문이다"고 지적했다.
경찰 관계자는 "관광 비자를 받고 와 세금을 내지 않고 돈을 버는 행위는 불법"이라며 "순찰을 할 때 이들의 판매 행위는 제지하고 있지만, 이들에게 피해를 보았다는 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일일이 단속은 어렵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