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529
박혜은의 님과 남(8)
은퇴 남편 TV시청에 가장 긴 시간 보내
남편에게 직접 점심 차리게 하는 것도 방법
은퇴 후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은 영식이다. [사진 Gratisography]
아내들 사이에서 은퇴 후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은? 집에서 한 끼도 안 먹는 ‘영식이’라는 말은 이제 진부할 만큼 익숙한 스토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본의 은퇴설계 전문가 ‘오가와 유리’가 2014년 소개한 자료에 따르면 은퇴 후 가장 인기 있는 남편은 ‘집에 없는 남편’이랍니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아침부터 밤늦도록 고생한 남편 입장에선 섭섭한 말일 수 있겠지만, 은퇴 후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집돌이 남편’은 아내에겐 다소 불편한 주인공입니다.
‘은퇴 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말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가족보다 일에 집중하며 대화나 자녀 양육 등 가족과의 소통에는 소극적이었던 남편들이 겪고 있는 증상입니다.
은퇴 후에 가정으로 돌아온 남성들이 가족과의 갈등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사회관계 또한 부족해 나타나는 부적응 현상을 말합니다. 대개 사소한 일에도 민감해지고, 잔소리가 심해집니다. 아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준비 없이 돌아온 남편과의 사이에서 ‘은퇴한 남편 증후군’을 앓습니다.
은퇴 남편 증후군 vs 은퇴한 남편 증후군
은퇴 후 부부관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 관계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런 점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예전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어떻게 잘 보내야 하는지를 몰라서 혹은 어색해서 일 수도 있습니다.
준비 없이 퇴직하다 보니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은 TV 시청입니다. 꾸벅꾸벅 졸다가도 텔레비전 소리가 꺼짐과 동시에 보고 있는걸 왜 끄냐며 고개를 드는 남편의 모습이 나 혹은 내 남편의 모습은 아닐까요?
은퇴자들의 하루 평균 TV 시청시간은 약 4시간 17분이다. 프리랜서 공정식
삼성은퇴연구소가 50대부터 70대의 은퇴자 382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60대 남성의 하루 평균 텔레비전 시청시간은 약 4시간 17분. 취미활동하는 시간의 5배, 운동이나 레저로 보내는 시간의 2.4배에 달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나라 남성들은 은퇴 후 대부분의 시간을 이렇게 집에서 보내면서도 집안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65세 이상 남성들의 가사노동시간은 미국(1시간49분)이나 영국(2시간48분)의 은퇴 남편들보다 훨씬 짧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안미영 국민대 행정정책학 교수가 ‘여성연구’에 발표한 ‘고령화와 젠더 불평등: 노인 부부의 무급 노동을 중심으로’을 통해 만 60세 이상 부부 2659쌍을 분석한 결과 남편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57.8분, 여성은 238.5분(약 3시간58분)으로 나타났습니다. 60세 이상 남편의 가사노동 분담률은 18.5%, 여성은 81.4%였습니다.
60세 이상 남성 어르신 40명이 요리교실에서 가정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국·찌개류 일품요리를 배우고 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조사한 우리나라 베이비부머 세대의 부부관계에 대한 만족도에 따르면 ‘대충 만족하고 산다’는 비중이 무려 62% 였습니다. 그저 불편함을 참고 대충 만족하고 살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길어 졌습니다. 은퇴남편 증후군, 은퇴한 남편 증후군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서로가 가진 은퇴 후의 생각에 대해 진지하게 들여다 보고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미래에셋은퇴연구소가 2014년 노후생활에 대한 부부간 생각 차이를 조사한 결과 남편의 60%가량은 하루의 절반 이상을 아내와 함께 하고 싶은 반면, 아내의 경우 같은 생각을 가진 비율은 30%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은퇴 후 주거 공간에 대한 기대도 서로가 달랐습니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은퇴관. [자료: 미래에셋은퇴연구소]
현재 은퇴 부부의 주인공격인 베이비부머 세대의 경우 부부이지만 둘이 보낼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서울대학교 한경혜교수는 2013년 ‘과거엔 부부 둘만 사는 시간이 1.4년에 불과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100세 시대에 갑자기 늘어난 여가 시간에 대한 노하우가 없다는 또 다른 얘기일 수 있습니다.
둘만 보낼 시간이 적은 부부는 서로 간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서로의 성격에 대해 속단하며 갈등을 더욱 키웁니다. 많은 경우 아내는 남편이 ‘무뚝뚝하다’, ‘욱하는 성격이다’ 등으로 단정해 버립니다. 남편 역시 자기 입장에서만 이야기하는 아내가 이기적이라 생각됩니다.
필요한 일은 직접 하려고 노력하는 남편, 모든 것이 처음일 수 있으니 직접 해보도록 도와주는 아내의 배려가 필요합니다. 해본 적이 없다면 세탁기 돌리는 법, 전자레인지 사용법 배우기부터 시작해 은퇴 이후 가족과 행복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야 합니다.
앞서 말한 일본의 은퇴전문가 오가와 유리는 ‘은퇴 남편 유쾌하게 길들이기’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썼습니다. 이를 통해 은퇴한 남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게 된 첫 시도로 '남편에게 점심을 직접 차리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스턴트 커피조차 직접 탄 적이 없던 남편은 무난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이후 점심식사 준비로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다고 합니다.
일본의 은퇴전문가 오가와 유리의 자전적 수필집 은퇴 남편 유쾌하게 길들이기
퇴직한 남편은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불안감을 감추려고 하기보다 드러내고 대화하려는 노력이 본인과 아내를 위해 꼭 필요합니다. 아내 역시 남편의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서로가 필요한 부분과 바라는 부분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끌어주어야 할 시기가 바로 은퇴 후 입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은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는 것! 모든 관계의 기본이 내 배우자에게만 적용되지 않았던 건 아닐까요?
결혼한 심장병 환자, 건강한 독신보다 장수
부부가 대화의 시간을 정해 나눠보자. [사진 smartimages]
배우자와의 좋은 관계는 나의 건강한 노후를 가지고 옵니다. 미국 시카고대학 노화센터의 심장병을 앓고 있는 기혼 남성이 건강한 독신 남성보다 4년 정도 더 오래 살았다는 조사결과도 있습니다.
일부로라도 ‘대화의 시간’을 정하고, 집을 떠나 새로운 공간을 찾아 대화를 나눠보는 것도 권해 봅니다. 서로가 은퇴후의 버킷리스트를 함께 작성해보는 건 어떨까요?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같이,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면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려 노력해 보세요. 침묵을 깨고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의 세마디를 익숙하게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박혜은 굿커뮤니케이션 대표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