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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은의 님과 남(20)
가족들을 위해 희생한 주부들의 대화 속 주된 주장은 '나는 피해자'라는 것이다. [사진 pixabay]
주말 동네 커피숍을 찾았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60대 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네 명이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자리를 잡기 무섭게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커피숍을 가득 채웁니다.
"이렇게 살 거 이게 무슨 부부고 무슨 가족이야!” 안 들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목소리라 가만 들어 보니 아들과 며느리가 다 모인 자리에서 남편이 아내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살지 말고 이혼해! 서로 편하게 살자" 며 “내 집이니 나가려면 네가 나가라"는 남편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 들어 친구들을 만나러 나온 겁니다.
물론 남편 분이 정말 그런 마음이었겠나 싶은 생각은 듭니다. 서로 언성이 높아지다 보니 남편도 말이 과하게 나간 셈이겠지요. 어쨌건 이야기의 진도는 하소연을 지나 꽤 구체적으로 나갑니다. 이혼 후 부부간 재산 분배는 어떻게, 또 얼마나 가능한지로 대화가 길게 이어집니다.
사실 아주머니의 하소연은 누구라도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말입니다. 대화 속 주된 주장은 ‘나는 피해자’라는 겁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살았는데"
"내 몸 망가져라, 왜 그렇게 살았는데…."
그런데 한참 열변을 토하고 난 후 아주머니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은 "당신 수고했어.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워?"였습니다. 이렇게 남의 집 이야기를 들을라치면 ‘어느 집이나 크게 다르지 않네’ 하면서도, 막상 내 이야기가 되면 '사는 게 다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지지 않습니다.
부부 싸움의 단골 레퍼토리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인데"
가족을 위해 참고 희생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상대를 생각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사진 smartimages]
아주머니의 대화내용은 공감이 되면서도 두 가지 큰 아쉬움이 듭니다. 첫 번째는 나는 가족을 위해 고생만 했다는 ‘피해자 의식’입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많은 가정에서 목소리가 올라갈라치면 한 번은 등장하는 레퍼토리입니다.
가족을 위해 참고 희생하는 것이 내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온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상대방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 욱하고 올라오는 거죠. 피해자가 있으면 가해자가 있는 법인데, 이런 경우 부부가 서로 피해자임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만 고생했느냐’로 대화가 이어지죠.
톨스토이는 사랑이란 자기희생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내가 빠진 자기희생은 사실 애정이 아닙니다. 상대만 신경 쓰느라 자신의 마음은 잘 읽지 못하는, 내가 없는 자기희생은 애정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이 '나를 희생하고 상대방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상대를 더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죠. 상대방에 대한 과도한 배려는 나와 상대를 위해서 경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려면 상대방 이전에 나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잘못한 건 그 인간인데 왜 내가 그래야 하냐’고 발끈하는 분도 있습니다.
『나한테 왜 그래요?』 고코로야 진노스케 지음. 유노북스.
일본의 유명한 심리상담사인 고코로야 진노스케는 저서 『나한테 왜 그래요』를 통해 상대방이 공감해주지 않거나 반응이 없다고 해서 상대방이 싫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렇게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
남편이 혹은 아내가 편한 사람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부정당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은 나를 위해 필요합니다.
릴케 "가까운 사람 사이의 거리감을 사랑하라"
"좋은 결혼은 그 속에서 고독의 후견인을 지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끝이 없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이 와 닿아 적어둔 적이 있습니다. “좋은 결혼은 그 속에서 고독의 후견인을 지정하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서조차 거리감이 명백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드넓은 하늘 아래서도 서로 다른 것을 보는 그들 사이의 거리감을 사랑한다면 어깨를 나란히 하는 멋진 삶이 자라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아쉬움은 고맙다는 그 흔한 말을 놓친 남편의 타이밍입니다. 어쩌면 타이밍 이전에 그 흔한 말이 나에게는 어려운 말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미사고(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다)’는 부부 사이에서 아무리 넘쳐도 모자라지 않은 말이라고 하죠.
소통이 잘 안 되던 부부라면 ‘명사 → 형용사 → 동사’로 대화 방식을 천천히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사진 smartimages]
박임진 한국교육심리연구소장은 ‘명사 → 형용사 → 동사’로 대화를 변화시켜보라고 권합니다. 소통이 잘 안 되던 부부 사이가 노력한다고 하루아침에 바뀌긴 힘들죠. 그러니 한두 번에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진행하라고 충고합니다.
새롭게 마음을 먹고 배우자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사랑(명사)이라고 말해 보고 그것이 입에 익숙해지면 사랑스럽다(형용사)는 말로 표현해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동사)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혹시 60대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나와 내 아내 혹은 남편의 이야기로 다가오진 않으셨나요?
박혜은 굿커뮤니케이션 대표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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