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채택·선고 일정 '오락가락'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헌법재판관들이 입장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복형·정계선·정정미·이미선 재판관,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김형두·정형식·조한창 재판관.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등 국민적 관심이 큰 사건에서 주요 결정을 번복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를 증인으로 채택하는 문제는 사흘 만에 결정을 번복했고,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 임명 보류 관련 사건 선고는 선고 예정 당일 연기됐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국민 10명 중 4명은 “헌재를 신뢰하지 못한다”고 답하는 여론조사 결과까지 나왔다.
◇3일 만에 증인 채택 뒤집기
헌재는 14일 윤 대통령 측이 증인으로 신청한 한덕수 국무총리를 오는 20일 불러 신문하겠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 측은 지난달 “한 총리는 계엄 관련 국무회의 상황 등을 아는 중요 인물”이라며 증인으로 신청했지만, 헌재는 지난 11일 “필요성이 부족하다”며 기각했다. 그런데 사흘 만에 결정을 뒤집고 다시 증인으로 채택하기로 한 것이다.
법조계에서는 “윤 대통령 측이 ‘지금처럼 불공정한 심리가 계속되면 중대 결심을 할 수밖에 없다’며 반발하니, 전체 재판 일정이 흐트러질까 봐 재신청을 받아준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헌재는 지난 4일 이미 한 차례 증인 신문을 마친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도 다시 증인으로 부르기로 했다.
홍 전 차장이 계엄 직후 작성했다는 ‘정치인 체포 명단’ 메모는 이 사건의 핵심 증거로 꼽힌다. 홍 전 차장에 대한 지난 신문 과정에서 양측 공방이 치열했지만, 헌재는 초시계로 시간을 재면서 “3분만 시간을 더 달라”는 윤 대통령 측 요청을 거절했다. 이후 지난 13일 조태용 국정원장에 대한 증인 신문 과정에서 홍 전 차장 메모의 진위 논란이 일었다.
조 원장은 국정원 내 CCTV와 홍 전 차장 보좌관의 증언 등을 토대로 ‘메모’의 작성 장소와 내용 등에 의문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윤 대통령 측은 홍 전 차장을 다시 증인으로 신청했고, 헌재는 평의 끝에 20일 그를 다시 불러 추가로 신문하기로 한 것이다.
◇앞서 헌재는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 임명 보류’ 관련 권한쟁의 심판을 3일 선고하겠다고 했다가 선고 2시간 전에 갑자기 연기를 발표했다. 변론을 한 차례만 하고 선고일을 잡는 등 ‘졸속 재판’ 논란이 일자 부담을 느꼈다는 게 당시 법조계 시각이었다. 헌재는 결국 지난 10일 다시 변론을 열고 재종결을 선언했지만 선고 날짜는 아직 밝히지 않은 상태다.
이런 재판 진행상의 문제가 노출되면서 헌재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낮아지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나왔다. 한국갤럽이 지난 11~13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4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이날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헌재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응답한 비율이 40%였다. 지난달(31%)보다 9%p 올랐다. 반면 ‘헌재를 신뢰한다’고 답한 비율은 같은 기간 57%에서 52%로 다소 줄었다. 한 부장판사는 “불신이 계속 커진다면 헌재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국민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8명 ‘전원 일치’로 돌파?
헌재는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듯 최근 심리 과정에서 ‘재판관 8명 전원의 일치된 의견’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의 재판장인 문형배 헌재소장 권한대행은 13일 윤 대통령 측이 소송 지휘에 관한 문제 제기를 하자 종이 문서를 들어 보이며 “자꾸 오해를 하시는데, 이게 제가 진행하는 대본인데 내가 쓴 게 아니다. (탄핵심판) TF에서 올라온 거고, (재판관) 여덟 분이 다 이의 제기하지 않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증인에게 직접 질문하지 못하게 하는 것, 검찰 조서의 증거 채택 여부 등 논란이 되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헌재는 “재판관 만장일치로 의결한 것” “평의를 거쳤다”고 하고 있다. 법조계에선 “헌재가 대통령 탄핵 여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절차적 흠결과 정치 편향 논란을 비켜가기 위해 ‘만장일치’를 강조하는 것 같다”는 해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