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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후반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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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李元翼, 1547~1634)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 역사 속에 수많은 명재상이 있었지만, 이원익(李元翼, 1547~1634)만큼 완벽함에 가까웠던 인물은 드물다. 선조, 광해군, 인조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그는 능력과 인품, 청렴한 삶으로 온 나라의 존경을 받았다. 인조반정 직후 이원익이 한양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민심이 안정됐다는 전설 같은 실화가 전해올 정도다. 
  
이원익이 주목을 받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다. 평안도 관찰사를 맡아 후방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우의정 겸 4도(강원·충청·경상·전라) 도체찰사로서 최전선을 지휘했다. 특히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는데, 평안도 백성들은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그의 선정(善政)에 감사했다고 한다. 이를 민망하게 여긴 이원익이 사당을 허물도록 하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다시 세웠다. 
  
선조가 남부 전선에 있던 그를 다시 평안도로 복귀시키려 하자 신하들이 한사코 만류하기도 했다. “오직 이원익만을 의지하고 있는 민심이 무너져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것이다(선조 29년 11월 9일의 실록기사, 이하 날짜만 표시). “비록 전쟁을 겪었지만, 이원익 덕분에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선조 27년 6월 24일)는 평가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이원익, ‘항상 보이는 지도자’로 백성의 신뢰받아  

이처럼 이원익이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항상 보이는 지도자(visible leader)’였기 때문이다. 그는 방패를 베고 군막에서 잠들었으며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밥을 먹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 백성이 고통받는 현장을 지키며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진정성을 백성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조 국가에서 임금이 아닌 신하에게 민심의 지지가 쏠린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왕의 의심을 사고 심지어 제거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원익이 모신 임금은 하나같이 그를 아끼고 중용했다. 그중에서도 인조는 남달랐는데 “경이 조정에 없으면 단 하루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인조 4년 8월 16일), “과인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듯 경을 바라본다”(인조 4년 12월 7일), “경이 머물러만 준다면 나라의 광영일 것이다”(인조 9년 4월 4일)라고 말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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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李元翼 )의 종가 옆에 있는 충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옛 문서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원익이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줬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인조 때 그의 나이는 이미 팔십 대였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조정의 최고 원로로서 그저 가만히 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원익은 “신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어찌 나라를 위한 일에 감히 목숨을 아끼겠습니까”라며 자신이 반란을 진압하러 평안도로 가겠다고 자원했다(인조 2년 1월 24일).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도 4도 도체찰사를 맡아 후방지원을 총괄하고 소현세자의 분조(分朝,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조정을 둘로 나누는 것)를 책임졌다(인조 5년 1월 17일).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원익은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기기만 하면 제일 먼저 달려왔다. 한번은 오랑캐가 국경을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자 85세의 나이에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도” 출사했는데(인조 9년 3월 28일), 이런 모습에 인조가 크게 감동했고 신하들은 “이원익이 어제 서울에 들어왔으므로 조야가 모두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라는 상소를 올렸다. 
  
요컨대 위기 앞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도 자원해 떠맡는 이원익의 행동이 백성뿐 아니라 동료 신하들, 나아가 임금의 신뢰를 끌어내게 된 것이다. 임금과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자신이 곧 쓰러져 죽기 직전의 상황이어도 행동에 옮기는 이원익에게 그의 진심을 의심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의미한 일이었다. 
  
더욱이 인조 대에 이원익이 보여준 처신에서는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이원익은 인조가 왕의 체면을 버리면서까지 간청하고, 때로는 강권하는데도 불구하고 조정에 나서질 않았다. 인조 초기 잠시 영의정을 맡았던 것을 제외하면 향리에서 움직이질 않는다. 나라에 큰일이 생겨 잠시 조정에 나오더라도 그날로 돌아가 버렸다. 조정 일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자문을 구해도 “노신의 정신이 혼미하여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인조 9년 4월 4일). 
  
물러나 있다가 위기 닥치면 앞장선 진정한 어른 

이는 그의 정신과 기력이 쇠약해져서거나 조정 일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만 자신이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라의 큰 공신이자 삼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최고 원로, 그것도 왕이 깍듯이 모시는 80대 노인이 조정에 나와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해보라.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시시콜콜 잔소리하고 가르쳐 들어보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도 잘하지 못하면서 후배들에게 부담만 줄 뿐이다. 
  
뒤로 물러나 있되 위기가 닥치면 앞장서는 모범을 보여준 사람, 입을 다물고 간섭하지 않되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지가 되어준 사람, 이원익은 그렇게 진정한 어른으로 남았다. 
  
김준태 동양철학자 역사칼럼니스트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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