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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트레킹]

자동차로는 갈 수 없는 산속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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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열차 타고 오른 1800m 
실트호른 정상의 회전 전망대 피츠 글로리아 전경. ‘007 여왕폐하 대작전’ 촬영지. / 스위스 관광청

소 떼가 느릿느릿 풀을 뜯었다. 목에 달린 방울 소리가 산과 계곡 사이로 딸랑딸랑 메아리쳐 울렸다. 작은 별 같기도 조그만 종 같기도 한 야생화들이 바람을 따라 노래하듯 고개를 흔들었다. 굽이굽이 이어진 산길을 따라 멀리서 점처럼 다가오던 트레킹객들이 스쳐 지나며 인사했다. "그루에치(Grüezi)!" '좋은 하루 되시라'는 인사말과 함께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주고받는다. 두 발로 흙길을 밟으며 이 아름다운 산의 속살을 들여다본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비밀스럽고 뿌듯한 미소다.


산에도 속살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스위스 여행은 대개 유럽 여행 중 하루 이틀 시간을 내서 취리히, 루체른, 융프라우 등 유명 관광지를 기념사진 찍으며 거쳐 가는 것이 흔한 코스. 그런 여행길에서 만나는 스위스의 산은 멀리서 바라본 사진 액자처럼 남는다. 하지만 경사가 심하고 도로도 뚫리지 않아 자동차는 가지 못하는 스위스의 산속으로 들어가면, 남들은 보지 못한 산악 지역의 속살,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절경들이 펼쳐진다. 호수를 향해 팔을 뻗으면 파란 물이 묻어나고, 초원을 향해 손을 내밀면 산의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관광객의 눈에는 아름답지만, 스위스의 험준한 산악 지대는 이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겐 싸워서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스위스인들은 유럽 최초의 코그휠(cogwheel·톱니바퀴) 열차, 깎아지른 절벽을 거슬러 오르는 케이블카, 호수를 가로지르는 페리 여객선과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달리는 파노라마 열차 등 다양한 대중교통 수단을 만들어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이었다.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간 곳, 세상에 이런 곳이 정말 있는 것인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초현실적 평화의 풍경 앞에서 찍는 '인생 샷'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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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열차 타고 오른 1800m 
리기산의 산악열차 곁을 날아가는 패러글라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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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열차 타고 오른 1800m 
루체른-인터라켄 고속 열차를 타고 본 스위스 중부 브뤼닉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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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열차 타고 오른 1800m 
루체른 호수 위의 페리 여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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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열차 타고 오른 1800m 
피츠 글로리아 전망대에서 발밑의 구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모습. / 스위스 관광청

'산들의 여왕' 리기(Ri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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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열차 타고 오른 1800m 
뮈렌의 절벽 트레킹 코스 ‘비아 페라타’. 해발 4000m의 아찔한 절벽을 지난다. / 스위스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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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니바퀴 열차 타고 오른 1800m 
독특한 음식과 뛰어난 전망, 200여 종의 허브 농원으로 유명한 리기 크로이터 호텔 에델바이스의 주인 그레고르 뵈뢰스(맨 왼쪽)와 동료들. / 이태훈 기자

취리히 중앙역에서 기차를 갈아타며 1시간 20분쯤, 별명이 '산들의 여왕'(The Queen of the Mountains)인 리기산 초입의 코그휠 열차 역에 도착한다. 리기산 여행의 시작점이다. 바바리아의 왕 루트비히 3세부터 독일 낭만파 작곡가 멘델스존, 프랑스 문호 빅토르 위고까지 수많은 유명 인사가 리기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지만 마크 트웨인의 일화는 그중 흥미롭다. 1878년 처음 친구들과 함께 리기산을 방문한 트웨인은 일출을 보기로 한 전날 밤 이 산의 공기와 분위기에 술만큼이나 취했고, 다음 날 오후에 일어났다. 그가 본 것은 일출이 아니라 해 질 녘 노을이었다. 20여 년 뒤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 한 철을 다시 리기에서 보낼 때, 그는 지금도 여러 문헌에 인용되는 찬사를 남겼다. "리기는 여태껏 살아본 곳 중에 가장 매력적인, 편안하고 평화로운 휴식의 장소다." 트웨인이 리기 지역을 방문한 것은 1871년 유럽 최초의 코그휠 열차가 설치되며 리기산 관광이 태동하던 때다. 이전에 이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친 농부들과 알프스를 넘는 순례객들, 일꾼을 사서 고급 세단 같은 가마에 앉아 산을 오를 만한 부자 귀족들뿐이었다. 이 지역 맥주 리기의 병 레이블에는 지금도 가마 그림이 그려져 있다.


코그휠 열차는 해발 1800m 봉우리 위까지 훌쩍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리기산 정상 리기 쿨름에 서면 이 산을 둘러싼 세 개의 호수인 녹회색의 주크, 사파이어 빛 청색의 루체른과 크리스나흐트 호수가 모두 내려다보인다. 멀리 독일 국경 흑림(Black Forest), 스위스 알프스의 높은 봉우리들이 360도로 펼쳐지고, 패러글라이더 몇 개가 파란 하늘 위에 날리는 붉고 노란 점처럼 미끄러진다.


리기산의 마을들 사이 산길에선 야생화와 호수, 설산과 숲이 어우러진 절경을 두 발로 직접 즐기는 사람들과 드문드문 마주친다. 이날 산행 안내를 맡은 조세프 아르놀트(74)씨는 "다양한 언어가 뒤섞인 스위스답게 인사말만 들어도 어느 지역 출신인지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루에치"는 리기부터 북쪽 취리히 출신 사람들이 건네는 가장 흔한 인사말. 남서쪽 베르네 고원 지역 사람들은 "그루에세흐"라고, 더 남쪽의 발레 사람들은 "탁 월"이라고 인사한다. 모두 '좋은 날 되세요'라는 의미다. 빙하기를 건너뛰어 살아남은 400여 종 스위스산 야생화, 동화 같은 집들…. 트레킹 코스 곳곳에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바비큐 포인트에는 땔감까지 준비돼 있다. 여행객이 준비할 것은 약간의 고기와 소시지, 맥주뿐이다.


리기산의 또 다른 명소는 미네랄 온천 리기 칼트바드(차가운 욕조라는 뜻)다. 영주와 농노의 계급 구분이 엄격하던 중세 스위스, 신심 깊은 세 자매가 계곡 지대 영주의 폭정을 피해 산 위로 도망쳤는데, 여행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살던 이들을 위해 샘이 솟아났다. 칼트바드엔 이 샘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어져 순례객들의 필수 코스가 됐고, 지금은 이 샘물을 덥혀 거대한 실내·외 온천 수영장을 채우고 관광객을 맞는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면 리기산과 그 아래 루체른 호수가 내려다보인다. 지금도 졸졸 흘러나오는 샘물의 수원지에는 300년 전 지어진 작은 예배당이 딸려 있다. 오래된 성화(聖畵)들과 최근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가 빛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경건해진다.


산 중턱 리기 크로이터 에델바이스 호텔에는 젊은 오너 그레고르 뵈뢰스(33)와 친구들이 집념으로 만들어낸 미슐랭 스타 식당과 동쪽으로 창을 낸 놀라운 전망의 18개 객실이 있다. 새벽 공기와 빛에 감탄하며 호텔 밖으로 나온 새벽 다섯 시, 사진으로도 언어로도 잡아낼 수 없는 리기산의 아침이 밝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홀린 듯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뮈렌(Müren)과 실트호른(Schilthorn)

톱니바퀴 열차 타고 오른 1800m 
리기산에서 코그휠 열차를 갈아타며 비츠나우까지 내려온 뒤, 비츠나우에서 페리 여객선 편으로 호수를 가로질러 루체른으로 간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환경과 싸우며 발달시켜 온 스위스 특유의 교통 시스템을 모두 담은 교통박물관이 백조들이 노니는 루체른 호숫가에 자리 잡고 있다.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만들어 산을 휘감듯 나선형으로 움직였던 수력 열차, 원형 객실 코그휠 열차 등의 실물과 모델이 시기별 종류별로 나뉘어 전시돼 있다. 아이들은 게임 같은 가상현실 체험을 한번 시작하면 내려올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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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른 중앙역에서 동(東)인터라켄으로 가는 파노라마 열차를 타고 뮈렌으로 향한다. 주변에 숲과 마을, 호수가 번갈아 나타나고, 푸른 잔디 호숫가엔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번갈아 바닥이 들여다보일 듯 맑은 호숫물에 몸을 담근다. 케이블카를 두 번 갈아타고 올라가는 뮈렌은 자동차로는 갈 수 없는 그림 같은 산속 마을이다. 해발 1638m, 베르네 고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마을 길을 걷기만 해도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의 설산들이 극장처럼 펼쳐진다. 설산으로 향한 호텔 객실 발코니에서 와인 한 잔을 따라 놓고 앉으면, 시원한 바람이 턱밑을 간지럽히며 지나간다.


뮈렌에서 놓칠 수 없는 곳은 케이블카를 두 번 갈아타고 올라가는 실트호른의 세계 최초 회전 전망대 피츠글로리아 전망대다. 영화 '007 여왕폐하 대작전'에 악당의 본거지로 등장했던 장소다. 한여름에도 영상 5도 아래의 낮은 온도여서 겉옷을 겹쳐 입고 가는 것은 필수. 적어도 오전 9시 이전에 올라가는 것이 좋다. 오전 11시만 넘으면 주변이 구름으로 뒤덮여 설산 풍경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 회전 전망대 식당에 브런치 뷔페를 먹으며 만년설에 덮인 산봉우리를 무제한 리필되는 샴페인 잔 속에 담아본다. 영화 촬영 과정 전시와 007 촬영 소품 등을 전시한 '본드 월드'도 늘 관광객으로 붐빈다.


야외 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두 가지 코스가 준비돼 있다. 어린아이나 노인을 동반한 가족은 김멜발트까지 약 2.3㎞, 1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들꽃 트레일'이 좋다. 이름 모를 들꽃들이 가득하고 경사도 낮은 오솔길로 꽃향기가 피어오른다. 도전 정신 충만한 젊은 관광객은 3시간 정도 걸리는 절벽 트레킹 '비아 페라타(Via Ferrata·Iron Path)'가 기다린다. 뮈렌 역 근처 스포츠용품점에서 안전 장구를 빌려 입고 전문 가이드와 함께 가는데, 해발 4000m의 아찔한 절벽과 계곡을 넘나드는 스릴로 충만하다.


뮈렌에서 숙소를 잡을 땐 설산 전망과 발코니가 있는지 꼭 확인하자. 새벽에 일찍 일어나 멀리 험준한 설산 위로 천천히 하늘이 밝아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평화롭다'는 건 이런 풍경을 이르는 말이었다는 걸 실감할 것이다.


[리기·루체른·뮈렌(스위스)=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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