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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제: 경술국치 108년 그날에 다시 걸어본 '고종의 길'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경복궁을 빠져나온 고종(高宗)이 어떤 경로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한제국 시기 미국 공사관이 제작한 정동 지도에 '왕의 길'(King's Road)이라 표시된 것이 있지만 그 길이 탈출로인지는 분명치 않다. 문화재청이 이 지도를 토대로 120m 길이 '고종의 길'(덕수궁 돌담길∼옛 러시아 공사관)을 복원해 8월 한 달간 시범 개방했다.
그 길을 두고 '러시아 공사관은 망명 정부였으며 이듬해 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진 길'이라는 긍정론이 제기됐다. 하지만 허울뿐인 제국 선포였다. 아관파천으로 궁지에 몰린 일제(日帝)는 전쟁을 일으켜 힘으로 러시아를 몰아내고 조선을 병탄했다. 경술국치 108주년을 맞은 29일 '스스로 지킬 힘이 없으면 독립할 수 없다'는 역사의 진리를 곱씹으며 '고종의 길'을 걸었다.
◇嚴妃,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다
을미사변(1895년 10월 8일)으로 민후(閔后·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서울엔 "왕이 곧 궁궐을 빠져나와 외국 공관으로 탈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고무라 주타로 당시 일본 공사는 사변 한 달 뒤 본국에 '국왕이 아관(러시아 공사관)에 도피할 것을 우려한다'고 보고하고 고종을 24시간 감시했다.
당시 경복궁 경비는 일본식 군사훈련을 받은 훈련대가 맡았는데, 고종이 궁궐 밖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 게 진짜 임무였다. 그 감시망을 뚫고 거사에 성공한 현장 지휘자는, 왕의 신임을 받던 대신도, 총포를 든 군인도 아닌 상궁 엄(嚴)씨, 훗날의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비(嚴妃)였다.
민후가 시해되자 고종은 10년 전 승은(承恩)했다가 민후에게 궐 밖으로 쫓겨났던 엄 상궁을 다시 불러들였다. 백성들은 혀를 찼다. '이때 이르러 부름을 받고 입궁하니 그 참변으로 민후가 돌아가신 지 겨우 닷새밖에 안 된 때라 장안 사람들이 모두 상감에게 심간(心肝)이 없다며 한스러워했다.'(매천야록)
그러나 독살이 두려워 수라상에 손도 대지 않고, 눈앞에서 딴 통조림과 껍데기를 깨지 않은 달걀로 끼니를 해결하던 시절이었다. 보다 못한 외국 공관 부인들이 수라를 통에 담아 자물쇠로 잠그고 열쇠를 고종에게 전해 식사를 들게 했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던 고종에게 엄 상궁은 제격이었다. 10년 전 왕과 동침한 뒤 승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방을 나서며 민후에게 도발했던 당찬 여성이었다.
실패로 끝난 1차 고종 구출 작전
을미사변이 있고 두 달이 채 안 된 11월 28일 새벽, 남만리·이규총 등이 이끄는 군인 800명이 임금을 구출하기 위해 경복궁에 쳐들어갔다. '춘생문 사건'이다. 그러나 내부에서 호응해 궐문을 열어주기로 했던 대대장 이진호의 배신으로 역공을 당했다.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주모자들은 처형당했다. 간신히 피신한 이들 중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가 궐 안의 엄 상궁과 모의해 2차 고종 구출 작전을 펼쳤다. 매천야록에는 이들이 엄 상궁을 거사에 가담시키기 위해 뇌물로 은 4만냥을 건넸다고 기록돼 있지만 그녀의 가담이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 상궁은 이 일에 자신의 미래를 걸었다. 탈출 준비는 치밀했다. 엄 상궁은 가마를 타고 수시로 궐문을 드나들며 경비병들에게 돈과 먹을 것을 뿌렸다.
가마 두 대로 왕 탈출시킨 엄 상궁, 아관에서 영친왕을 잉태하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마침내 아관파천이 단행됐다. 엄 상궁은 가마 두 대를 준비해 시녀와 나눠 타고 건춘문(경복궁 동문)을 빠져나갔다. 겨울이었고 나들이하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병사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엄 상궁은 평소대로 엽전 꾸러미를 내밀었다. "추운데 수고들 하오." 병사들은 반색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엄 상궁 마마님 행차시다. 문을 열어라." 그 가마 안에 고종과 왕태자(훗날 순종)가 숨어 있었다.
엄상궁으로 널리 알려진 엄비
파천을 공모한 러시아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왕을 맞이했다. 인천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군함 소속 수병 120명과 대포, 탄약 등이 거사 전날 아관으로 이동 배치됐다. 뒤늦게 출동한 일본군은 발만 굴렀다.
엄 상궁은 거사 후 아관에서 왕의 아이를 임신하며 상궁 신분을 벗었다. 1897년 10월 마흔셋 늦은 나이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이다.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8일 뒤 일이었다. 엄비는 큰 배포와 영특한 머리로 왕의 옆자리를 차지했으나 나라의 미래를 보는 눈은 없었다. 순종은 성(性)불구이니 그가 요절하면 자기 아들이 황위에 오를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기울고 어린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자 교육 사업에 헌신해 진명·숙명 여학교를 세우고 양정의숙에는 거액을 기부했다.
엄비는 생전에 아들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1911년 사망했다.
러시아 공사관 피신 고종의 첫 명령은 "김홍집·유길준… 잡아 죽이라"
김홍집, 유길준
고종은 아관에 들어가자마자 경무관 안환을 불러들여 "총리대신 김홍집, 내부대신 유길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군부대신 조희연, 법부대신 장박은 역적이니 잡아 죽이라"고 명했다.
개화파의 거두 김홍집은 광화문 앞 거리에서 백성들 손에 온몸이 찢겨 죽었다. 정병하는 이완용의 부하에게 경무청 문앞에서 피살됐고,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고향 보은으로 도망가다가 용인에서 살해당했다. 유길준 등 살아남은 개화파는 조선을 탈출했다.
이 땅에서 정적(政敵)은 불구대천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12년간 조선에 머물며 내정간섭을 했던 위안스카이(袁世凱)조차 생전의 민후에게 "대원군에 대한 가혹한 정치 보복을 삼가고 화해하라" 권했다. 대원군과 민후의 반목은 일본이 을미사변에 대원군을 끌어들여 이용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정적을 기어이 제거하는 구태(舊態)는 해방 후에도 재연됐다. 김구·여운형 등 일제도 건드리지 못했던 민족 지도자들이 해방된 조국에서 동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해방될 때까지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이니 숙청하자"는 극단적인 적폐 청산 주장도 횡행했다.
그 와중에 임정 세력과 국내파 지도자의 불화를 봉합하려던 송진우가 암살당했다. 그가 찬탁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생각이 다르면 적으로 돌리는 분위기 탓이 컸다.
일제가 '요시찰 인물 암살 계획'에 이름만 올렸을 뿐 손대지 못했던 장덕수는 두 우파 정당(한민당과 한독당)의 통합을 추진하다가 반대파에 살해당했다.
참고한 책: 언더우드 부인의 조선견문록(릴리어스 호톤 언더우드), 못생긴 엄 상궁의 천하(송우혜), 이완용 평전(윤덕한), 조선왕조사(이성무), 젊은 대한민국사: 건국(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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