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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16)
내가 경남여자고등학교 입학 후에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일어났다. 그때는 중·고등학교를 합쳐 고등학교라고 했으며 4년제였다.
우리는 학교 수업 중 군복의 단추 달기, 허리띠 만들기를 하고 심지어 방직공장에 차출돼 솜으로 만든 실을 뭉치는 작업도 했다. 흰 천에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바늘 한 바늘 매듭을 지어 정성껏 수놓아 센닌바리(1000명이 만드는 허리띠)라는 허리띠를 만들기도 했다. 군인들은 전쟁터에서 센닌바리 띠를 매고 있으면 이를 작업한 우리들의 정성으로 죽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전시 중에는 먹고살기가 어려워 학교에서 보리빵을 두 개씩 배급했는데, 돈을 내는 아이들에게만 줬다. 모니카, 꽈배기, 암볼 등의 과자도 나왔다. 과자는 줄을 서야만 살 수 있었고, 양이 적어 뒤에 있는 애들은 사 먹지도 못했다.
일 제 후반기엔 쌀 모자라 죽 끓여 먹어
전쟁 후반기에는 쌀이 모자라서 친척 집에서 얻어와 죽으로 끓여 먹었다
전쟁 후반기에는 배급 주는 쌀도 모자랐다. 순사(지금의 경찰)의 눈을 피해 벼농사를 짓는 친척 집에서 얻어와야 했다. 쌀을 아끼느라 죽으로 끓여 먹었다. 그때 어머니는 야채 죽을 잘 끓였다. 쌀 조금에 당근, 시금치, 연근, 콩 간 것을 넣고 맛있는 죽을 끓여주셨다. 내 사촌 동생은 집밥보다 맛있다며 그 죽을 얻어먹으려고 자주 들렀다.
나는 몸이 약했다. 방직공장 일을 할 때 솜 알레르기 때문에 가슴에 통증이 생겨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밤이면 잠을 자기도 힘들었다. 그런 증상을 앓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일본 천황이 전쟁에 항복한다는 담화문을 라디오에서 들었다. 그것이 우리나라가 독립되는 8·15 해방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다.
해방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나라가 독립국인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해방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른 채 단지 전쟁이 끝난 것만으로 해방이구나 생각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조선총독부를 세우고는 강력한 압제정치를 펴고 있었다. 민족말살정책으로 일본 글을 배웠으며 한자도 일본 말로 익혔다. 특히 내가 살던 부산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관문이라서 일본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일본인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해방 당시 나는 그 문화에 길들어져 있었다. 일본사람에 대한 거부감도 적대감도 없었다. 일본인들이 당황해하며 서둘러 짐을 꾸려 일본으로 달아나다시피 하는 가운데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서야 대한민국이 우리나라이며 독립국임을 알게 됐다. 비로소 일본은 한국을 침략한 나쁜 나라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남여고 시절. 해방을 하며 학교에서 처음으로 한글을 배웠다. [사진 김길태]
해방으로 학교생활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때까지 일본 글만 배워왔던 나는 그때 처음 가나다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차차 우리말을 한글로 쓸 수 있게 됐지만, 맞춤법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아 지금도 소리 나는 대로 적다 보니 맞춤법이 엉망이다.
또 외국어로 영어를 알파벳 ABC부터 배웠다. 학교에는 일본 선생이 떠난 그 자리에 아버지 친구인 김하덕 이란 분이 교장으로 부임했고, 초등학교 5~6학년 때 담임이던 정신덕 씨가 국어 선생으로 와 반갑고 놀라웠다.
코 큰 양키 무서워 집에서 잘 나오지 못해
거리에는 코 크고 키 큰 미국 군인들이 지프를 타고 왔다 갔다 했다. 우리는 ‘양키’라고 불렀다. 그들이 무서워 집에서 잘 나오지도 못했다. 흑인들도 있어 더욱 무서웠다. 양키들은 지프를 타고 다니면서 껌을 찍찍 씹으며 껌과 초콜릿 과자를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굶주린 아이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헤이, 기브미 초콜릿”을 외치며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학교에서는 정해진 교과서도, 책도 없었으니 가르치는 사람도 미숙했고 배우는 우리도 힘들었다. 사회도 혼란스러웠다. 이런 환경에서 1년을 배웠으니 영어는 이솝우화 외 한 줄도 제대로 못 읽었고 한글은 문법도 모르고 맞춤법도 미숙했다. 그래도 졸업은 했다. 한글은 우리나라 말이어서 읽고 쓰고 다 할 수 있었지만 영어는 남의 나라말이라 지금도 서툴다.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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