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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1)

우리 옛이야기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신화, 전설, 민담에는 현대에도 적용 가능한 인간관계의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은 어느 무엇보다도 우리를 지치게 한다. 나 하나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의 갈등을 심도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가 옛이야기이다. 우리 옛이야기를 통해 내 안에 숨어 있는 치유의 힘을 일깨운다. <편집자>
 
최근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었다. ‘실수는 넘어진 것, 실패는 넘어져 있는 것.’ 실수와 실패를 가르는 경계는 자신이 겪은 일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역시 난 안 돼’ ‘이런 일을 겪었으니 난 이제 완전 재기 불능이야’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을 때 인생은 실패한 것이 된다. ‘아, 운이 안 좋았군’ ‘이번엔 잘 안 됐지만, 그건 이러저러한 일 때문인 것 같으니 다음번엔 좀 더 잘해 보자’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일은 잠깐 실수한 것이 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실력이나 노력이 부족해 실수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면 이성적인 성찰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타인이나 환경 때문에 실패했다고 판단하면 여기에 억울함이라는 감정이 더해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휘말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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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엿장수 부부에게서 윗도리(상체)만 있는 채로 태어난 우투리. [일러스트 김예리]
 
‘아기 장수 우투리’로 알려진 이야기다. 옛날에 가난한 엿장수 부부에게서 윗도리(상체)만 있는 아이가 태어났다. 부부가 일을 나갔다 돌아와서 보면 선반에 올려둔 엿이 사라지고 없었다. 
 
부부가 하루는 몰래 숨어 망을 보니 윗도리밖에 없는 어린아이가 도랑에서 가재를 잡아 실을 매어 선반 위로 던져 엿을 꺼내 먹고 있는 것이었다. 부부는 아이에게 역적 같은 놈이라고 욕을 했다. 아이는 그런 소리를 들으니 성공하기는 틀렸다며 아무 날 아무 시에 죽을 테니 곡식을 함께 넣어 묻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무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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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죽으면 곡식과 함께 넣어 묻고 무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 우투리. [일러스트 김예리]


 
아기 영웅의 좌절

아이는 정말 그날 숨이 끊어졌고, 부모는 아이의 유언대로 묻어주었다. 얼마 후 나라에서 윗도리라는 사람을 잡아들인다며 군인들이 몰려왔다. 부부는 군인들이 협박하자 윗도리의 무덤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군인들이 윗도리의 무덤을 파내자 곡식이 군사와 말이 되더니 윗도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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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투리의 무덤을 파내자 곡식이 군사와 말로 변해 우투리와 함께 사라졌다. [일러스트 김예리]
 
부조리와 불평등에 물든 세상을 구원해줄 영웅의 탄생이 좌절되는 순간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는 데엔 영웅 탄생에 대한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다. 기왕이면 성공한 영웅의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았을 걸 자기 존재가 발각된 그 지점에서 아기 장수는 악 소리 한번 내 보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그라졌다.
 
천시(天時)가 아니었을 뿐이라고 위로하기엔 허망한 죽음이다. 남과 다르고 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의 안위에 나쁜 영향을 줄 존재로 여겨져, 싹수를 잘라내야 할 불온한 인생이 된다. 아기 장수는 이처럼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위협에 굴복해 실패한 영웅이 되었다.
 
전설 속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세상이 정해 놓은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자식을 둔 부모는 무의식중에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뛰어난 능력이라 할지라도 가재를 이용해 선반 위 엿을 꺼내 먹는 것 같은, 곡식으로 군사와 말을 만들어 분연히 일어서려는 능력을 부모가 자식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그저 남과 같기를, 적당한 때 적당한 능력을 갖추어 적당히, 안정적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세상은 세상대로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이를 존중하고 우대하는 듯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능력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깎아 내고 끌어내려야 하는 대상이 된다.
 
여기에 좌절해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실패로 마감하게 된 인물이 아기 장수라면, 타인의 시기와 질투에도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결국 세상을 굴복시킨 인물이 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름을 모를 수가 없는 홍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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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가 서자 출신으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연마한 도술 실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홍길동. [사진 MBC-TV 추석특선만화 '돌아온 영웅 홍길동']
 
양반가 서자 출신은 태생부터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서 열외인 존재다. 그 한계를 인식한 홍길동이 자기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여념이 없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게 된 홍 판서의 첩 초란은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한다. 윗도리로 태어나 비범한 능력을 보인 아기 장수를 관군이 찾아내 제거하려 한 것과 동일한 상황이다. 그러나 홍길동은 자신이 연마한 도술 실력으로 자객과 맞서 승리한 뒤 집을 나서 세상에서 이름을 떨쳤다.


 
홍길동의 성공

“대장부 세상에 나매 공맹을 본받지 못하고 이름을 얻지 못한다면 어찌 대장부라 할 수 있으리오” 라며 야망을 드러내 보였던 홍길동은 세상의 인정을 얻은 뒤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해 세상 경영의 능력까지 펼쳐 보였다.
 
지금 나는 넘어져 있는 것인가, 잠깐 넘어진 것인가. 내 안에 품고 있는 이야기가 아기 장수의 것이라면 나는 세상을 구원할 영웅이 되기 전에 관군에 들켰다는 것 하나만으로 스스로 재가 되어 스러질 것이다. 그러나 내 안의 이야기가 홍길동 것이라면 나는 주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내 능력으로 일어서 세상에 내 뜻을 펼쳐 보일 것이다.
 
그때엔 부당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나를 일으키는 힘이 될 것이다.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아기 장수도 알고 홍길동도 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면 된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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