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면 바다의 주인도 달라진다. . 이맘때 거제에선 서둘러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일단 항구에서 아침을 맞는다. 외포항은 부산 기장 대변항, 남해 미조항과 함께 전국 3대 멸치 집산지다. 4~6월이면 이른바 ‘봄멸’이 항구 사방에서 펄떡거린다.
흥남 철수의 현장인 장승포항 앞에는 고향의 맛을 내는 노포들이 굳건히 자리를 지킨다. 옥포동와 고현동에는 조선소 노동자들이 먹여 살린 술집이 허다하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침이 마를 시간이 없다.
멸치의 재발견
외포항 효진수산횟집에서 멸치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찌개·구이·회무침·튀김·젓갈 등 멸치를 활용한 다양한 음식이 올라온다. 백종현 기자 거제도 동쪽 끝 외포항의 아침. 고깃배가 은빛 멸치 잔뜩 싣고 동녘 햇빛을 받으며 항구로 들어온다. 봄이 왔다는 증거다.
먼바다에서 겨울을 나는 멸치는 봄이 오면 산란을 위해 근해로 든다. 멸치잡이는 어부들도 혀를 내두르는 극한 직업이다. 대개 유자망으로 한꺼번에 낚는데, 그물코에 걸린 멸치가 문제다. 그물 길이만 1㎞에 달해, 멸치를 털어내는 데만 족히 3시간이 걸린다. 배 한 척이 보통 25㎏ 박스 200개 분량의 멸치를 쏟아낸다.
멸치털이는 봄의 장관인 동시에, 지독한 삶의 현장이다. 볼품없이 빼빼 마른 사람을 가리켜 멸치라고 하지만, 봄멸은 생각보다 살집이 많다. 겨우내 살을 찌워 몸도 제법 실팍하고, 10~15㎝에 이른다.
하여 다양한 요리로 해먹을 수 있다. 멸치쌈밥 먹는 법은 간단한다. 매운 양념에 자작자작하게 끓여낸 멸치를 깻잎이나 상추에 싸 먹는다.
외포항 앞으로 멸치를 다루는 횟집과 젓갈집이 10여 곳에 이른다. ‘효진수산횟집’에서는 멸치코스(1인 2만원)를 ‘무한 리필’로 낸다. 매운 양념에 자작자작하게 끓여낸 멸치를 상추?깻잎에 싸 먹는 멸치쌈밥을 시작으로 회무침?튀김?구이 등이 올라온다. 모든 메뉴가 가시를 바를 필요도 없이 한입에 쏙이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봄멸은 진정한 밥도둑이다.
도무지 밥 한 공기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시큼한 바다의 향 멍게비빔밥과 대구탕. 거제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든든한 한 끼 식사다.
멍게(우렁쉥이)도 지금이 제철이다. 멍게는 전국 출하량의 70%가 통영과 거제에서 나는데, 자연산이든 수하식이든 3~6월 것을 최상품으로 친다.
여름이 오면 속살이 녹아내려 먹지 못하는 일이 잦아진다. 수하식 멍게를 키우는 일은 굴의 그것과 사뭇 닮았다. 밧줄 형태의 긴 봉에 멍게의 유생을 다닥다닥 붙인 후 바다에 넣어두면, 플랑크톤 따위의 영양분을 흡수하며 알아서 큰다.
수명은 대략 5년으로, 2년쯤 지나면 먹기 좋은 크기로 자란다. 멍게는 다른 거 없다. 몸집이 크고 단단하며 붉은색이 선명한 것이 좋다. 살이 많고 맛 좋은 멍게를 고르는 비결이다. 거제포로수용소 앞의 ‘백만석’이 멍게로 이름난 전문 식당.
멍게비빔밥(1만2000원)이 대표 메뉴다. 생물이 아니라 5~7일가량 저온 숙성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 맛의 비결. “숙성 과정에서 멍게 특유의 비린 맛과 떫은 쓴맛은 덜어내고, 향긋한 짠맛만 남기는 것이 핵심”이라고 안희성 대표는 말한다. 한 그릇이면 보통 멍게 6~7개가 들어간다. 김?깨소금?참기름을 두루 넣고 비비면 바다 향 가득한 비빔밥 완성이다. 고등어?게장은 물론 맑은 끓은 대구탕까지 딸려 나온다. 멍게의 비린 맛을 잡아주는 대구탕 덕에 연신 숟가락질하게 된다.
노포의 추억
장승포항 앞 중식당 '천화원'. 1951년에 문을 열어 삼대를 이어온다. 평생 주방을 지켜 온 배영장(77)·배진륜(47) 부자가 대표 메뉴인 삼선짬뽕을 맞들었다. 두 사람 다 팔뚝에 기름 자국이 선명하다.
1950년 12월. 1만4000명의 피란민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함경남도 흥남항을 빠져나와 거제 장승포항에 들었다. 이른바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흥남 철수작전’의 기억이다.
거제는 실향민의 터전이다. 당시 철수선이 닿았던 장승포항 앞에는 지금도 피란민이 차린 식당이 남아 있다.
장승포 우체국 옆 ‘천화원’은 거제에서 가장 역사 긴 중식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