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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서 작가로, 장연진
인생에서 누구나 한번은 환승해야 할 때와 마주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직장이나 일터에서 퇴직해야 하죠. 나이와 상관없이 젊어서도 새로운 일,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실패한 뒤 다시 환승역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인생 환승을 통해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생한 경험을 함께 나눕니다. <편집자>
내가 30대 초반에 삶의 노선을 바꾸게 된 건 어쩌면 첫 직장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예정돼 있었는지 모른다. 대입 재수를 하기 위한 경제적 자립의 방편으로 경찰 공채시험을 봤으니 말이다. ‘재수 기간까지 합쳐 5년 후 대학을 졸업하면 꼭 내 길을 찾아 떠날 거야.’ 운 좋게 첫 시험에 합격해 경찰종합학교로 교육을 받으러 가면서 한 다짐이 이러니 철딱서니도 이런 철딱서니가 없다.
그런데도 조직은 이렇게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내게 다양한 경험을 할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교통 내근 및 외근, 홍보 활동, 경호, 대민 봉사, 심지어 형사 업무까지. 그런데 여자형사기동대 근무가 내 퇴직을 재촉했다. 부서 자체가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탓도 있지만, 형사 업무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을 발령 낸 게 문제였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집필 공간인 포란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 [사진 장연진]
한번은 쑥탕에서 중년여성들이 도박한다는 신고를 받고 대원들과 출동했는데 검거가 된 이들 중에 이미 전과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 법규상 누범은 구금하게 돼 있어서 내 눈앞에서 바로 유치장에 수감이 됐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를 범법자로 보기 이전에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만 보고 내가 한 사람의 신체를 구속했다는 생각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저 사람은 법을 몇 차례나 어겼고 우리는 정당한 법 집행을 한 거라고 자신을 아무리 설득해도 유치장에 수감되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 박혀 떠나질 않았다.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쓴 채 펑펑 우는데 신임도 아니고 아직도 경찰 본연의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 직업의식에 근본적인 회의가 일었다. 그 끝에 더 방황하지 말고 이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떠날 채비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초심보다 5년이 더 걸려 10년 만에 마침내 인생 환승을 시도했다. 뒤늦게 찾은 소설가의 꿈을 좇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잠시 대학원에 들어가 소설을 배우고 쓰는 행복한 시절도 있었지만, 마치 내 의지를 바닥까지 시험하겠다는 듯 가정사가 번번이 내 발목을 잡아 부러뜨리려 했다. 예정에 없던 둘째가 들어서는 바람에 시작부터 차질이 빚어진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경찰 공무원 시절 미아 보호 활동 홍보용으로 찍은 사진. [사진 장연진]
대학원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집필실까지 얻었는데 이혼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설상가상으로 이혼한 지 7개월 만에 둘째가 뇌출혈을 일으켜 대수술까지 받았을 땐 내 운명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그냥 빌 뿐이었다. 평생 아이 뒷바라지만 해도 좋으니 그저 살려만 달라고.
두 아이가 아침마다 회사나 학교에 가면, 나는 매일같이 세상 가까운 곳으로 출근한다. 여느 직장인처럼 머리를 감고 기초화장을 하고 옷까지 깔끔하게 갖춰 입은 채 바로 내 서재, 포란실(抱卵室)로.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둘째가 돌아오기까지 불과 네댓 시간. 그 한 줌의 시간이 주어지기까지 몰아친 폭풍우를 생각하면 천금보다 소중해 그렇게 나만의 의식을 치르며 책상 앞에 앉았던 게 버릇이 됐다.
그러고는 한 편의 소설을 부화하기 위해 주제를 담을 얼개를 짜고 그 안에서 각각의 인물이 살아 꿈틀거릴 수 있도록 착상의 몸살을 끙끙 앓는다. 내가 창조한 작중 화자가 상황에 맞게 문장을 구성하고 적확하게 단어를 구사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쉴 새 없이 사전을 뒤지기도 한다.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나도 모르게 해찰을 피우기 일쑤다. 덤으로 우리말을 되새기고 퍼뜨리는 지킴이 노릇을 하는 것 같아 스스로 기꺼워하면서.
천생이 미욱해 그렇게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소설들이 번번이 감별의 문턱을 넘어서진 못했지만, 나는 오늘도 묵묵히 그 고독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세상 누구의 간섭도, 통제도 받지 않는 오직 나만의 시간! 나는 왜 이 무급의 시간이 이토록 좋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