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넣은 짜파구리는 위선과 차별의 아이콘 부유층 꼬집는 기호
메뉴의 함의 이해 못하고 호기심 자극 아이템에 눈길… '문해력' 수준 드러낸 건가
언젠가 역사가 될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기록에서 2월 20일에 있었던 한 해프닝은 작지만 의미심장한 한 줄을 차지할 것이다. 대통령 내외가 봉준호 감독 등 '기생충' 제작진과 배우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해 영화 속 '짜파구리'를 깜짝 대접하며 희희낙락했던 일이다.
그날은 31번 신천지 확진자가 확인된 지 이틀이 지나고 국내 첫 사망자가 발생한 날이었다. 이후 닥쳐온 국가적 재난 사태를 예견할 수는 없었겠지만 이미 드러난 불길한 조짐만으로 이런 행사를 삼가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희희낙락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온 나라가 암울한 상황에서 모처럼 국민을 기쁘게 한 문화적 성과를 낸 이들을 흥겹게 축하하는 게 무슨 큰 흠이겠는가. 우리는 장례의 슬픔마저 축제로 승화시키는 민족이다.
문제는 '짜파구리'였다. 영화 속 짜파구리는 짜장 우동 라면에 고기를 넣어 고급스럽게 만든 요리다. 이는 겉은 대중적이고 평등해 보이지만 속은 귀족적(대중 기호 식품조차 차별화된 방식으로 고급스럽게 소비)이고 권위적(한밤중 전화 한 통으로 가정부를 시켜 대령)인 부유층의 삶을 꼬집는 기호였다. 청와대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스타 셰프를 불러 이 요리를 준비했다고 한다. 영화 속 설정의 충실한 재연이었다.
짜파구리의 영화 속 함의가 무엇이건 이를 먹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 주재하는 공식 오찬에서 그 영화의 감독에게 해당 메뉴를 제공하는 건 다른 문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직접 이 메뉴 소개에 나섰다고 한다. 파티의 하이라이트였던 셈이다. 어안이 벙벙한 이 일은 행사 주최 측이 기생충이라는 영화, 그리고 거기 등장하는 짜파구리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문해력(literacy)의 수준을 드러낸 것이다.
문해력이 낮은 이들에게 세상사는 천진한 아이들의 세계처럼 단순해진다. 그 함의가 무엇이건 호기심을 자극하는 아이템에 눈길이 꽂힌다. 선과 악, 정의와 부정의가 한 가지 잣대나 가치, 이를테면 외모, 말주변, 연줄 내지 의리로 평가되기 시작한다. 복잡한 인간관계, 옳고 그름에 대한 성숙하고 섬세한 이해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이런 문해력 관점에서 이 정부의 불가사의했던 많은 일들이 설명된다. 상식을 벗어난 숱한 인사 실패, 소득이 증가하면 소비가 늘어 경제도 성장하게 된다는 소득 주도 성장론, 감상적 영화 한 편에 눈물을 흘린 탈원전 정서…. 사례는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통해 선과 악,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정형화된 구분을 허문다. 영화 장면들은 겉보기에 선하고 순진하지만 차별 의식과 비정함으로 가득한 상위 계층의 행태를 비춘다. 동시에 영화는 이들을 상대로 문서 위조, 사기 행각을 서슴지 않고, 부자들이 가진 것에 무임승차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가난한 자들의 몰염치를 보여준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말한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이 바보들아."
영화 속 파티는 끔찍한 칼부림들로 끝을 맺는다. 특히 마지막 분노의 칼끝은 유혈 상황에서조차 빈곤의 냄새에 눈살을 찌푸리며 코를 막는 박 사장(부잣집 아버지)의 가슴에 꽂혔다. 위선의 중심에 대한 감독의 가차 없는 응징이었다.
이러한 거장 감독에게 위선과 차별의 아이콘인 짜파구리를 헌정해 '충격'을 안긴 기괴한 파티가 있은 지도 20여 일이 흘렀다. 바이러스의 시간이었다. 바이러스 원천 차단은 실패로 끝나고 온 국민이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를 지역 감염 위험에 노출되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처방 앞에 온 사회가 멈추었다. 하지만 그다음 계획이 무엇인지 들려오지 않는다.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마스크조차 제대로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분노와 탄식이 절로 새 나온다. 세월호 참사를 그토록 공격하던 이 정부의 재난 감수성이 이전 정부와 다를 게 무엇이냐는
분노, 아득하게 쌓여가는 인명과 재산 피해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탄식이다. 하지만 이 위기 상황은 어떻게든 넘겨야 한다는 차가운 인내심이 이런 감정을 누른다.
이 비상한 시기,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전이 '짜파구리 헌정 파티' 같은 감수성과 문해력에 이끌릴까 두렵다. 오직 과학과 팩트에 기반한 계획이 있기를 바란다. 침묵과 순응의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