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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도(奎章閣圖). 서얼은 타고난 신분으로 인해 능력이 있어도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다 정조는 개혁 정치의 일환으로 당색에 물들지 않은 서얼 출신들을 등용했는데, 이때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이 규장각 검서관에 발탁됐다. 이들은 각신을 보좌하고 서적을 교정하고 서사(書寫)하는 일을 담당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에서 신분제 때문에 울분을 삼키고 살아야 했던 대표적인 존재가 서얼(庶孼)이다. 서얼은 첩의 자식을 이르는 말로, 어머니가 상민일 경우에는 서자(庶子), 노비일 경우에는 얼자(子)라고 불렀다. 서얼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가문의 대를 이을 수도 없었다. 관직에 나아간다 해도 승진할 수 있는 품계가 제한돼 있었다. 태종 13년(1413) 서얼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이 만들어진 뒤로 서얼의 신분 차별 철폐 요구가 이어졌다. 

 

영조 즉위년인 1724년 12월 17일, 서얼인 진사(進士) 정진교(鄭震僑) 등 260명이 장문의 상소 한 통을 올렸다. 그전에 이미 수차례 서얼금고법 폐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영조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정진교는 영조가 궁궐을 나가 경종의 신주를 맞이하는 날을 미리 알아 두었다가 영조의 행차가 잘 보이는 곳에서 긴 장대를 들고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장대 끝에는 종이를 매달았는데, 종이에는 뜻을 펴지 못해 궁한 사람이 한을 품는다는 뜻의 ‘궁인포원(窮人抱寃)’ 네 글자가 크게 적혀 있었다. 이를 본 영조는 즉시 상소를 들이라고 명했다.

 

서얼이 벼슬을 못하게 막는 법은 천하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중국은 삼대부터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에 이르기까지 서얼이 장수가 되고 재상이 되어 명성을 떨치고 공적을 쌓았습니다. 우리 동방은 위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5백여 년에 이르기까지 인재를 선발함에 있어 중국의 방식을 일관되게 준용해 차이가 없었습니다. 

 

<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정진교는 서얼이 벼슬하지 못하게 하는 법은 애초에 없었다는 내용으로 상소를 써내려갔다. 이어서 태종 때 우대언(右代言)인 서선(徐選) 등이 주창해 서얼의 자손을 요직에 등용하지 못하게 한 뒤로 강희맹(姜希孟)이 ‘경국대전’을 편찬할 때 관직에 진출하거나 과거시험을 볼 수 있는 길까지 아울러 막은 일을 언급했다. 이후로도 서얼금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시행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선조 초에 신분(申) 등 1000여 명이 상소해 원통함을 호소한 일에 대해 선조가 하교한 내용을 써내려갔다.

 

 

 

선조 :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것은 곁가지라고 해서 다르지 않으니, 어찌 꼭 정실(正室)에게서 태어난 적자만이 신하가 되어 충성을 바치기를 바라겠는가?

 

<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정진교는 선조가 서얼에 대해 지닌 생각을 지극히 공정한 마음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인조 때 주요 신료들이 서얼 차별 문제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하나하나 언급해나갔다.

 

우의정 정유성 : 적자와 서자의 구분은 집안에서만 했지 조정에서는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문벌을 가장 많이 따진 육조六朝 때에도 사람을 쓸 때는 오로지 아버지의 성姓만 묻고 어머니의 성은 묻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인재를 낼 때 귀천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임금이 사람을 쓸 때 가문에 구애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늘의 이치로 보면 당연한 일이라서 역대 임금들이 바꾸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원익·윤방 : 서얼을 비천하게 여기고 박대하는 것은 천하 만고에 없던 법이니, 임금이 신분을 따지지 않고 어진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도리에서 크게 어긋납니다. 

 

오윤겸 : 서얼의 벼슬을 금지하는 것은 선왕들이 하셨던 지극히 공정한 정사가 아니니, 벼슬길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실로 이치에 맞습니다. 시행하기 어렵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적자와 서자의 분별이 문란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적자와 서자의 구분은 집안일일 뿐이니, 조정에서는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등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7일>

 

 

 

정진교는 인조 때 정국을 운영하던 주요 신료들이 서얼에 대해 지닌 인식을 통해 서얼금고 철폐가 자신들만의 주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뒤이어 역대 명신 중에 서얼 출신이 많았음을 말하면서, 서얼을 등용하는 길을 넓혀줄 것을 요청했다. 정진교 등이 일으킨 이 일을 두고 당시 사관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유자광 이후로 서얼을 청직에 임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얼들이 스스로 청직에 임명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으니, 조정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조실록 즉위년 12월 17일>

 

 

 

당시 사관이 간신의 전형으로 알려진 유자광을 언급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갖은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얼 출신으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사림들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이 사림들이 조선 시대 내내 서얼을 차별하는 주된 이유가 됐다. 정진교의 상소를 본 사관의 생각도 사림의 기본 인식과 다르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사관들이 서얼금고법 철폐 문제에 대해 이같이 논평한 사례는 실록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정진교의 상소를 받아 든 영조는 “하늘과 사람은 하나이고 해와 달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비추는데, 왕이 인재를 등용하는 데 어찌 차이를 두겠는가? 다만 유래가 오래되어 갑자기 변경할 수 없으니 천천히 방법을 강구해서 처리해야 한다”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어 인조 때의 수교(受敎·임금이 세자, 세손 등을 책봉할 때 내리던 교명)에 따라 호조, 형조, 공조의 낭관에 서얼을 임명할 수 있게 하라고 명했다. 이전보다는 다소 나아진 상황이지만, 서얼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는 것에 대해서는 갑자기 바꿀 수 없다는 이유를 대며 한발 물러섰다. 

 

적서 차별에 기반한 조선의 신분제는 서얼들에게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었다. 영조나 사관의 언급을 보면 아직까지 조선에서는 서얼에 대한 차별을 철폐할만한 사회적 여건이 성립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영조 이후 일부 관직에 서얼이 등용되기도 했으나 실질적으로 서얼이 신분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약 170년이 지난 갑오개혁(1894) 때였다. 중인인 차좌일(車佐一)의 ‘사명자시집(四名子詩集)’에 실린 글 한 줄을 통해서도 신분 차별에 대한 원통함이 느껴진다.

 

이 세상에 나고 또 난다 해도 영원히 이 나라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영조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하교를 내렸을지 궁금하다. 오늘을 사는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벽’은 어떠한가? 또 그 벽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신동아 2019년 4월호

 

강성득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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