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강산에가 지난해 4월 3일 북한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 열린 남북예술인 연합 무대 ‘우리는 하나’ 공연에서 노래 도중 돌아가신 이북 출신 부모님 이야기를 하면서 울먹이고 있다. 평양공연 사진공동취재단 제공
‘…라구요’가 실린 그의 데뷔 음반 재킷.
1989년 8월 15일 오후 2시 22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북한에 파견한 문규현 신부와 손을 잡은 반팔 티셔츠 차림의 스물두 살 여대생이 판문점을 통해 남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그는 국가안전기획부에 의해 구속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통일의 꽃’이라고 불린 한국외국어대 4학년 임수경이었다.
임수경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규현과 임수경, 이들 두 사람은 그렇게 한국전쟁 이후 155마일 휴전선을 걸어서 건넌 최초의 민간인이 됐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통일의 노래
48년 남북 분단이 확정되면서 통일은 한반도의 슬픈 민족적 의제가 됐다. 49년 암살당한 김구는 아마도 통일을 둘러싼 최초의 정치적 희생자일 것이다. ‘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유명한 구호 아래 불붙었던 4·19 직후 대학생들의 통일 열기는 6개월도 되지 않아 5·16의 철퇴를 맞고 무너졌다.
박정희 철권통치 기간 동안 통일은 오로지 중앙정보부의 독점 용어였다. 민간에서의 통일운동은 곧 간첩 행위를 의미했다.
하지만 1000만명에 육박하는 이산가족이 한반도와 세계 도처에 살아있는 한 통일은 언젠가는 꺼내야 될 한민족의 화두였다.
87년 시민항쟁은 직선제를 획득했고 이는 노동운동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대학가의 운동 세력은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에 이어 마침내 통일운동을 전면적으로 한국 사회에 제출했던 것이다.
통일에 대한 수많은 노래가 대학가에서 만들어졌다. ‘반전반핵가’ 같은 격렬한 투쟁가에서 ‘서울에서 평양까지’ 같은 가요풍의 노래까지 그 스펙트럼은 넓었지만, 경직된 이념적 방향성 때문에 노래들은 거개가 잊혀졌다.
하지만 92년 가을, 어느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무명의 인물이 모든 사람의 허를 찌르는 분단의 노래를 내놓았다. 한의대를 중퇴한 이 나이든 신인의 노래는 바로 고전의 반열에 올랐는데, 바로 강산에의 ‘…라구요’였다.
92년은 신세대 감수성의 폭발을 불러온 서태지와 아이들의 충격적인 데뷔 앨범이 단 3개월 만에 전국을 함락시킨 해였다. 서울 동숭동 소극장에선 한 명의 작은 영웅이 오랫동안 벼린 칼날을 곧추세우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객석에 반말을 마구 토해내는, 통념에 어긋나는 무대 매너로 신문 연예면에 가끔씩 등장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오기로 무장한 그의 데뷔 앨범은 주류의 용광로 속에서 형해화하거나, 아니면 언더그라운드의 무대를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록 음악의 빈 공간을 채우면서 한국 대중음악 대안의 지표가 됐다.
거의 평지돌출과 같이 놀라운 그의 데뷔 앨범 안에서 한국의 록과 포크는 새로운 희망을 서술한다.
김민기의 비판적 문제의식과 신중현의 음악사적 문제의식이 만났으며, 안치환의 진지한 호소력과 김수철의 예측 불가능한 자유분방함이 얽혀들어 있었다.
강산에의 노래에서 조용필이나 송창식 같은 카리스마적 권위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본능적인 충일감으로 70년대 청년문화가 표명한 ‘눈뜸’의 에너지와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주역들이 아낌없이 분출한 좌충우돌의 반항적 이미지를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데뷔 앨범을 구성하고 있는, 거의 그 자신에 의한 8개의 곡은 에너지와 이미지의 결정체다.
앨범의 머리를 장식하는 ‘할아버지와 수박’이 열어 놓는 흐벅진 리듬과 명징한 향수, ‘…라구요’가 포섭하고 있는 대중음악 언어의 전복, 로큰롤에 남은 최후의 미덕인 직진성이 훌륭하게 형상화된 ‘예럴랄라’…. 그 어떤 곡이든 로큰롤 청년의 비타협적인 정신과 위배되지 않았다.
강산에는 스타덤에 현혹되지 않고 라이브 공간에서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90년대 한국에서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로커의 정도’를 밟음으로써 그의 권능을 더욱 공고히 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주류로 부상한 랩 댄스 뮤직의 ‘싹쓸이’식 매니지먼트 시스템 안에서 80년대의 별들이 속절없이 퇴조의 숙명을 강요당하는 순간에도 대중음악의 진정성에 목말라 있던 비판적인 수용자 그룹들에 의해 그의 앨범은 저주받은 걸작이 될 비극에서 벗어난다.
작지만 단단한 그의 성공은 이 환멸의 시장에서 빛나는 한줄기 희망이 됐다.
그러나 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은 그 힘겨운 성취가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고서야 가능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앨범에서 ‘무제’로 재탄생하게 되는 ‘돈’이 사전심의에 걸려 연주 파트만 실린 것이다.
들꽃 같은 강산에의 출현
우리에게 필요한 건 한 장의 밀리언 셀러가 아니라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다종다양한 음악적 실험 속에 녹아든 자유와 개성의 목소리다.
우리에겐 80년대 중후반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에서 조용한 풍요를 맛본 기억이 존재한다. 전인권과 김현식의 사자후는 애상의 정조로 일관했던 대중음악의 음습한 분위기를 강렬하게 걷어내 버렸고 유재하와 하덕규는 섬세한 시정을 교직했다.
한영애와 장필순은 여성 보컬리스트의 독자적인 선언문을 기안했으며, 신촌블루스에서 시나위에 이르는 다양한 밴드들은 그룹 음악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이들의 왼쪽 끝에서는 투쟁의 숨결과 미래에 대한 격정적인 전망들이 합법적으로, 또 불법적인 경로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 모든 목소리들의 공통된 핵심은 알량한 기교가 아니라 그것의 한계를 넘어선 불꽃같은 생명력이었다.
하지만 서태지에 의해 새롭게 가요사가 쓰이기 시작한 92년 이후 이 들풀 같은 생명력은 급격하게 거세됐다. 우리가 본 것은 상업적 성공을 위해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는 영혼의 기나긴 대열뿐이었다.
이러한 매너리즘의 벽에 빛의 구멍이 있었다면 그중의 하나가 강산에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강산에의 데뷔 앨범은 조화(造花) 더미 속에 핀 들꽃 같았다.
앨범의 진가가 대중에게 각인되기까지 그에겐 맨발로 라이브 무대를 뛰어야 했던 1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앨범의 오프닝곡인 ‘할아버지와 수박’은 버터 냄새가 느끼하게 진동하지 않는, 흥겨운 로큰롤 리듬과 블루스 스케일 위에 한국적인 서정이 통쾌하게 펼쳐진 곡이었다.
이 곡의 뒤를 잇는 ‘…라구요’는 의심할 나위 없는 그의 최고 걸작이다. ‘눈물 젖은 두만강’류의 전통적인 5음계의 트로트를 교묘하게 패러디해 분단의 아픔을 슬프지만 무겁지 않게, 솔직하지만 가볍지 않게 묘사했다.
80년대 대학가를 불타오르게 했던 통일에 대한 열망은 리버럴한 장발의 청년에 의해 이렇게 내면화됐다.
강산에의 출세작인 이 노래의 최대 미덕은 구호의 관념성이 아니라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감정이입이다. 이 감정이입이 소름 끼치도록 생생했던 건 실제로 그가 이산가족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부모는 분단의 희생자들이다. 그러나 희생자가 어디 우리 가족뿐이겠는가. 나의 어머니는 충청도 태생이신데 함경도로 시집을 가 열다섯 살 위의 형을 낳고 전쟁을 맞았다.
내 형의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을 흥남부두에서 남쪽으로 피난시키고 혼자 남으셨다.
그리고 분단은 고착됐고, 어머니는 거제도에서 힘겨운 삶을 꾸려 나가다가 역시 단신 월남한 실향민인, 나의 아버지와 재혼했다. 내가 형과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형에 비하면 나는 복 받은 인생이다. 전쟁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묻고 싶다. 이런 운명의 피해자들을 만든 가해자들은 어디에 있냐고, 정말 모든 사람들이 ‘전쟁’에 대해서 깊은 인식들을 갖고 있느냐고. 이런 생각이 ‘…라구요’에서 2집의 ‘더 이상 더는’과 ‘선’으로 이어졌다.”
강산에는 신해철과 서태지가 이룩한 한국 록 음악의 반대편 봉우리에서 자신의 희망을 기술했다. 그는 프로그레시브와 얼터너티브의 세계관이 아닌, 김민기에서 들국화에 이르는 한국적 울림의 피를 이어받았다. 대중음악이 더이상 단순한 일회성 소비재이거나 이데올로기 통제의 위안물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강산에의 초기 앨범들은 위안이 됐다.
그리고 록이 장발에 가죽 재킷을 두르고 고성을 질러대는 한심한 음악이라는 편견을 가진 이들에게 강산에의 앨범들은 록이 현실 질서에 대한 음악적 반동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음악은 테크닉보다는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진정성을 통해 감동의 여운을 만들어낸다는 평범한 명제를 되새기게 만들어줬다. ‘…라구요’가 바로 그 증거다.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