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티에스피모델제공
서울 모처의 한 건물 관리사무소에 60대 남성이 엉거주춤 들어섰다.
“저… 경비 구한다기에 면접 보러 왔습니다.” 키 181cm에다 17세기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를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 거기에 소싯적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약간 세월을 맞은) 얼굴…. 면접관은 그를 위아래로 한번 훑고서 생각한다.
‘보아하니 멋을 너무 부리는 것이 왠지 모자는 삐딱하게 쓸 것 같고, 한쪽 다리는 꼬고 앉을 것 같은데….’
그러다 못내 “출근하려면 그 수염과 머리는 바꿔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럴 순 없었다. 이 남성에게 수염과 긴 머리는 곧 ‘존재의 이유’ 같았다. 장장 30년 동안 고수한 ‘스따일’이다. 연탄배달을 하면서도, 과일을 팔면서도, 순댓국을 끓이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경비 자리를 찾기로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매번 같았다. ‘이제 뭘 해야 한단 말인가.’ 가족들의 얼굴이 방울방울 스쳐 지나갔다.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긴 백발이 눈치 없이 찰랑거렸다.
2017년 겨울 어느 날의 회고다. ‘5G 할아버지’ 그로부터 몇 개월 뒤, 2018년 3월 서울 패션위크 현장. 쭉 뻗은 런웨이 위로 장신의 노신사(老紳士)가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발을 디딜 때마다 은빛 머리카락이 물결친다.
객석에선 카메라 세례와 함께 “이 세상 ‘간지’가 아니다!”라는 환호성이 쏟아진다. 줌을 당겨 얼굴을 자세히 보니, 어라? 지난 연말 경비 면접을 보러 온 그 남자다. 시니어모델 김칠두(金七斗)씨 얘기다.
9남매 중 막내 남자라 붙인 이름인데 형님들은 일두, 이두, 삼두로 두(斗)자 돌림을 쓴다. 올해 65세. 혹자의 말마따나 ‘태생부터 모델 포스’지만, 사실 그는 경력 1년 남짓한 ‘새내기’다. 신인가수에게 최고의 무대가 지상파 가요 프로그램이라면, 모델에게는 패션위크다.
그는 국내 최초로 패션위크에 오른 시니어모델이다. 대중에게는 KT 통신사 5G 광고로 얼굴을 알렸다. ‘5G 할아버지’ ‘한국의 간달프’ 등 벌써 별명도 여러 개다.
김씨와 인터뷰한 건 2019패션위크를 막 끝낸 지난 3월 말이었다. 그는 “패션위크에서 보통 큰 행사는 둘째 날인데, 이번에 둘째 날 첫 쇼인 ‘바로크 무대’에 섰다”면서 “모델 김칠두를 좀 더 알릴 수 있는 아주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모델은 오랜 꿈”
1978년, 20대 초반의 김칠두씨는 옷에 관심이 많아 누님 의상실에서 일을 도왔다.(사진 왼쪽)
1980년 어느 날. 2017년 겨울에서 2018년 봄 사이,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마치 기적처럼 ‘짠’ 하고 모델이 된 것 같지만, 사실 가슴 한쪽에서 오랫동안 무르익어가던 꿈이 그 순간 발현된 거였다. “어릴 때부터 옷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누님 의상실에서 일을 도우면서 국제복장학원(현 국제패션디자인직업전문학교)에 잠깐 다녔어요.
20대 초반인 1977년에는 한양모델대회에서 입상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모델은 생경한 직업이었지만 주위에선 ‘천직(天職)’이라며 그를 부추겼다.
1974년 고등학교 졸업사진.(사진 왼쪽) 2002년 아들과 함께.
“내력인지는 모르겠어요. 조실부모(早失父母)해서 윗대 이야기는 듣지 못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모델 하겠다’고 나설 형편이 아니었죠. 그런 시절도 아니었고요. 집안이 넉넉지 않아 결국 복장학원도 그만둬야 했어요.” 먹고살기 위해 꿈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다 접진 않았다. “미련이 남아 옷과 관련된 일을 하기로 했어요. 남대문시장에서 지퍼 도매상도 하고, 직접 디자인한 옷을 팔기도 했죠.
도매시장은 많이 팔아야 남는데, 많이는커녕 잘 팔리지도 않았죠.” 옷 공장에서도 일했다. 아내는 그때 만났다. 그는 “친구 소개로 니트공장에 취업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근무하는 아내 모습이 조신해 보이고 여성스러워서 먼저 대시했다”며 웃었다.
성공과 실패
순댓국집을 운영하면서도 긴머리와 수염을 포기하지 않았다.(사진 왼쪽)
장사가 잘돼 지점을 15개나 낸 적도 있다. 그렇게 가장(家長)이 됐다. 꿈보다 중요한 게 생긴 셈이다. 그때부터 옷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고,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쌀 도매, 연탄 배달, 과일 가게…. 그러다 여유자금이 생겨 경기도 시흥의 시장 한구석에 순댓국 가게를 열었다.
“아내와 종일 일하고 나서 저녁에 국밥 한 그릇에 소주 한잔 하는 것이 낙이었어요. 기사님들이 지방에 갔다 서울 올라오는 길에 휴게소가 아닌 우리 가게를 방문해줘서 식사하고 가던 모습도 기억에 남네요.
식당 할 때도 이 스타일 그대로였어요. 물론 그땐 머리는 묶고 수염은 좀 더 단정했죠. 그때 상호가 ‘털보토종왕순대촌’이었어요. 간판에는 제 사진도 넣었죠, 허허.” 장사는 아주 잘됐다.
맛집으로 소문 나서 지점을 15개나 냈다. 급기야 순대공장까지 차렸다. 수입이 점차 늘자 복집·돼지갈빗집 등 다른 음식 가게에도 손을 뻗었다.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잘되다 하나씩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프랜차이즈에 밀리기도 했고요. 결국 하나둘 정리하고 평택에 있는 돼지갈빗집을 끝으로 27년간의 사업을 접었죠.” 가게는 다 없어졌고 빚만 남았다.
2017년 11월, 그의 나의 63세. 딸과 아들은 장성했지만 일을 놓을 순 없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골몰히 생각했다. ‘이제 뭘 하며 살아야 하지.’ 그때 딸이 방문을 두드렸다. 딸의 권유 “평소 딸과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에요. 딸에게 털어놓았어요. ‘아빠가 일자리를 구하려고 요 며칠 공사 현장에도 나가봤는데 체력이 달려 민폐만 되더라. 경비일도 안 되겠더라. 할 줄 아는 건 요리와 장사뿐인데… 면접도 보러 갔는데 나이 때문에 안 써주더라’ 고요.” 딸이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생각해봐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 그게 뭐지? 배달·요리·경비·막노동…. ‘현실과의 타협’이라는 양분을 먹고 자란 무성한 잔가지를 하나씩 쳐나갔다. 그러자 세월의 더께에 가려져 채 싹트지 못한 꿈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난 어렸을 때부터 옷 입는 걸 좋아했지.
한때 상도 탔어. 남대문시장에선 직접 디자인한 옷을 팔기도 했잖아. 젊었을 때는 주위에서 키도 크고 하니 모델 해보란 소리도 많이 들었지.’ 과거를 회상하며 흐뭇한 웃음을 짓자, 딸이 “아빠, 어서 가요” 하며 손을 잡아 끌었다. “그 사이 딸이 뚝딱뚝딱 알아본 거예요.
시니어모델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학원이 있더군요. 그 길로 ‘더쇼프로젝트 모델아카데미 시니어과정’에 등록했습니다. 딸과 상의하기 전까지는 내가 패션에 관심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산 거죠. 아마 많은 사람이 그럴 거예요.”
모델학원 처음 가던 날
2018년 2월, 모델 학원 문을 두드렸다. 학원 대표가 간단하게 상담하고 나서 “앞에서 워킹을 한번 해보라”고 했다. “신기한 게 전혀 떨리지 않았습니다. 즐거웠어요, 재밌고. 내가 좋아하는 걸 찾으러 간 거니까. 대표님이 좋은 말만 해줘서 그런지 자신감도 생겼고요.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기분이었어요.” 그때부터 워킹수업과 함께 포토, 연기수업을 매주 두 시간 수강했다. 워킹수업에서는 기본자세부터 동선, 음악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웠다. 포토수업 겸 연기수업에서는 표정 연기법을 익혔다. 집에서도 연습은 계속됐다. 그렇게 한 달쯤 흘렀나. 대표가 패션 브랜드 ‘키미제이’의 오디션을 보러 가자고 했다.
오디션 직후 디자이너는 그를 그 자리에서 런웨이 모델로 발탁했다. 그러고 나서 2018년 3월, F/W 헤라서울패션위크에 오르면서 정식 모델로 데뷔했다. 첫 무대에서도 떨림은 없었다. “수업을 들은 지 한 달이 채 안 됐으니, 아무것도 모를 때잖아요.
그저 평소처럼 열심히 연습하고 무대에 올랐는데 떨리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환희를 느꼈다고 할까요. ‘이게 패션쇼구나’ 하면서. 열심히 해서 더 많은 무대에 서고 싶었습니다.” 그야말로 ‘무대체질’이었다. 쇼를 마치고 나오니 수많은 모델과 사진작가가 “같이 사진 찍자”며 몰려들었다. 그 순간을 저장하고 싶어 SNS를 시작했는데, 벌써 팔로워가 5만명에 달한다.
“20대 팔로워들이 ‘형님’ 하면서 댓글을 남기는데, 참 재밌는 글들이 많아요. 그런 글을 보다 보면 20년은 젊어진 느낌입니다, 허허허.”
“예순 넘으니 오히려 두려움 없어져”
아무리 오랜 꿈이라 해도, 환갑이 지난 나이에 모델로 인생 2막을 시작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의 성격도 한몫했다. 김씨는 “워낙 뒤를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면서 “오히려 육십이 넘으니 두려울 게 없더라”고 했다. ― 동갑내기 친구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
간혹 TV에서 저를 보고 ‘너 나온다’ ‘너 봤다’는 카톡을 보내는 친구도 있는데, 몇십 년 된 친구들은 그러려니 해요. 어렸을 때부터 옷도 남다르게 입고 다녔기 때문에 ‘너 원래 그런 놈이었지’ 하고 이제는 별 반응이 없어요.”
― ‘이 일을 하기 참 잘했다’ 싶을 때와, 그 반대는 언젠가요. “살면서 한 번 입어볼까 말까 한 옷을 입어보기도 하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 있게 서보기도 하고…. 인생에서 쉽게 해보지 못할 경험을 많이 하고 있어요. 그럴 때면 ‘모델 하기를 참 잘했다’ 싶습니다. 물론 힘들 때도 있죠. 촬영장이나 패션쇼장을 가면 대기시간이 길거든요.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특히 힘들더군요.”
― 보통 어린 신인들은 중년 스타를 롤모델로 삼는데, 60대 신인은 누굴 롤모델로 삼습니까. “(웃음) 이 나이에 딱히 있을까 싶지만, 롤모델이라기보다는 요즘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사람은 생겼습니다. 모델 배정남. 유독 그에게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잘 모르겠는데, 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세계 4대 패션워크에 서고 싶어”
― 화창한 봄이지만, 중년 남성은 패션의 변화가 적은 것 같아요. 패션 팁을 공유해주시면. “아… 이 질문 참 어렵다. 자신의 체형을 잘 알고 그에 맞춰 입는 게 베스트예요. 저는 잘못 입으면 상당히 왜소해 보이거든요. 그래서 항상 한 치수 크게 입습니다. 그리고 색 조합을 잘 활용해 코디하죠.”
― 언제부턴가 중년 남성의 ‘유니폼’이 되다시피 한 등산복 룩은 어떻게 보시나요. “요즘은 등산복이 다양하더라고요. 딱히 등산복을 즐겨 입지 않지만, 아웃도어 브랜드 촬영을 가보면 등산복 같지 않게 잘 나오던데요. 등산복 살 때 갖고 있는 옷과 코디가 잘 되는지 알아보고 구매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 앞으로 남은 생은 모델로 보내겠죠?
정상(頂上)은 어디로 삼고 있습니까. “세계 4대 패션위크가 있다고 하죠. 런던·뉴욕·밀라노·파리, 이 4개 중 하나라도 한국 시니어모델 대표로 서는 게 목표입니다. 그리고 최근 욕심이 생긴 분야는 연기예요. 카메라 앞에 서는 모델은 어쨌든 연기가 필요하기에 연기 연습은 꾸준히 할 것입니다.” 실제로 김씨는 올해 연극에도 도전했다.
지난 2월 25일 막을 내린 〈검은 옷의 수도사〉에서 수도사 역을 맡았다. 이 또한 딸의 제안이었다. “누구나 끼가 있다” “(딸이) 서울대 음대에서 가야금을 전공했는데, 지금 잠시 연극무대에 서고 있어요. 등장인물이 5명 정도인 작은 공연인데, 일일 배우를 신청할 수 있었어요.
딸이 배역을 먼저 신청하고 저에게 해보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하겠다고 했습니다. 대사가 워낙 철학적인 내용이라 입에 안 붙어서 고생했지만, 딸과 함께 연습하고 몇 번 무대에 오르다 보니 익숙해지더군요.”
― 마지막으로 소싯적 꿈을 잊고 사는 이 시대 가장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누구나 갖고 있는 끼가 하나씩 있을 거예요.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두려움과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다만, 그걸 깨느냐 담아두느냐가 관건이겠죠. 마음의 결정이 되었다면 한번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